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신대원 신부의 雜說

2024-08-11     신대원

가을이 들어선다는 입추(立秋)도 지났건만, 날씨는 여전히 한증막이다. 조금이라도 시원한 구석을 찾아 헤매 돌아보지만, 그래도 방구석만한 데가 없을 듯해 보인다. 팔월의 중순을 열어젖히는데 문득 “말복(末伏)”과 “광복절(光復節)”이 반긴다. 안동의 오래된 서원의 입구를 가보면, 햇볕이 사정없이 내리쬐는 데도 뜨겁게 피우는 붉은 꽃을 만날 수 있다. 지난달에 하회마을 병산서원의 배롱나무가 일품이었다고 적었지만, 지금 시기처럼 더운 여름날에 핏빛 꽃을 피운다는 것은, 어쩌면 우리네 인간들의 인내심을 시험해보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을 해 본다.

눈에 보이는 산천초목은 온통 초록빛의 세상이다. 그 때문인지는 몰라도 배롱나무꽃은 한층 더 우리 마음을 뜨겁도록 불타오르게 한다. 자신을 돋보이게 하려고 설마 붉은 꽃을 피어올리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일찍이 도종환 시인은 <백일홍>이라는 시를 적으면서 이렇게 노래한 대목이 있다.

피어서 열흘 아름다운 꽃이 없고
살면서 끝없이 사랑받는 사람 없다고
사람들은 그렇게 말을 하는데

가만히 들여다보니
한 꽃이 백일을 아름답게 피어 있는 게 아니다

함께 있다 돌아서면
돌아서며 다시 그리워지는 꽃 같은 사람 없는 게 아니어

수없는 꽃이 지면서 다시 피고
떨어지면 또 새 꽃봉오릴 피워 올려
목백일홍 나무는 환한 것이다

꽃은 져도 나무는 여전히 꽃으로 아름다운 것이다
제 안에 소리 없이 꽃잎 시들어가는 걸 알면서
온몸 다해 다시 꽃을 피워내며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이다

확실히 시인의 관찰력은 몹시도 날카롭도록 예리하다. 하지만 정확한지는 모르겠다. 어찌 되었든 꽃 하나하나가 이어달리기하듯 피면서 모름지기 100일 동안 견뎌내면서 지상을 붉게 물들인다는 것이 아니겠는가? 해서 “100일 동안 피는 꽃으로” 착각한 것은 누구의 잘못도 아니다. 그저 인간의 아름답고도 절제된 순수한 정감이 아닐까?

세상이 아무리 이상해져도, 그 때문에 공동의 집인 지구가 이상하게 돌아가도 해야만 될 것과 하지 말아야만 될 것에 대해서 분별해내고 구별해내는 일은 “인간의 일”이 아니겠는가? 입추가 지났는데도 가을 냄새는 아직이다. 이번 광복절에는 또 어떤 패배주의적 망발이 SNS에 도배될지 하마 궁금해지지만, 그렇지만 아무리 어려운 일이라도 시작도 하기 전에 실현되기 어려울 것이라는 “패배주의적인 생각”만은 하지 말아야 될 터인데 말이다.

흔히 하는 말로, 어떤 이는 “유지필성(有志必成)”이라 말하고, 또 어떤 이는 “유지경성(有志竟成)”이라고 말하는데, 먼저는 “뜻을 가지면 반드시 이루어내어야 한다.”이고, 그다음은 “뜻을 가진다면 끝내 이루어 내리라.”라는 뜻일 것이다. 같은 듯 다르고, 다른 듯 같은 글자이지만, 그래도 “유자필성”보다는 “유자경성”이 훨씬 좋아 보인다. 왜냐하면 백일홍꽃 닮았기 때문이다. 입추가 되어도 후텁지근한 여름이 계속되는 것처럼 보여도 끝내 여름은 가고 가을이 오지 않겠는가? 이는 “반드시 이루리라” 보다는 “끝내 이루리라”라는 어투를 더 좋아해서 거기에 힘을 주고 싶은 편향된 필자의 사고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광복절”에 관한 유감스러운 구도들을 굳이 들먹거리고 싶지 않지만, 아직까지도, 여태까지도 해결되지 못하고 뭉그적거리고 있는, 있으면서 자꾸만 정당화하고 키워가고 있는 것은 도종환 시인이 “아무도 모르게 거듭나고 거듭나는 것”을 말하지는 않을 것이다. 맷집을 키워내고, 인내심도 키워내고, 결단력이며 분별력도 키워내는 것은 언제나“살아있는 사람들의 몫”이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을 것이다. “유자경성”은 백일홍의 근성인지도 모르겠다. 여름이 끝나가고 가을로 향하는 길목에서 더위 먹은 것인지 별별 생각이 밤하늘 유성처럼 흐르는 요즘이다.

 

신대원 신부
천주교 안동교구 태화동성당 주임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