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음적 열정에 대한 무관심의 교회화

영적 세속화 시대, 성직자 권위주의에 대한 유감-1

2024-07-28     한상봉 편집장
사진출처=pixabay.com

 

그분을
보기 위해
나무 위에 올라갔지만
그분을
만나기 위해서는
내려와야 했다네.

조희선 시인의 <사랑을 말하지 않았다>(도서출판 꽃잠, 2015)에 실린 「삭캐오」라는 시다. 가톨릭신자가 진리를 찾아가는 길에서 수도자와 성직자가 되려고 작심할 때는 늘 ‘더 높은 곳을 향한 갈증’이 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나무들처럼 천상을 향해 손을 뻗치고 올라가려고 애를 쓴다. 그러나 복음서가 ‘영광스러운 변모’ 이야기에서 보여주고 있듯이, 정작 그분의 정체를 발견하고서는 다시 산을 내려가야 한다. 내려가 마을에서 그분을 직접 만나야 한다.

그분은 구름 속에도, 천둥번개 속에도 계시지 않는다. 성당의 높은 첨탑에 갇혀 계시지도 않고, 제대 위에만 앉아 계시지도 않는다. 그분은 미풍 가운데 우리 마음속에도 계시고, 사람들 사이에서 당신의 냄비를 걸고 계신다. 그분이 밥 짓는 냄새를 맡고, 그분이 떠주는 밥을 얻어먹어야 우리는 그분과 더불어 ‘거친 이승’을 동반할 수 있다. 엠마오를 지나던 제자들처럼 그분과 대화를 나누고, 그분을 느낄 수 있다. 이처럼 사제들은 양들의 냄새뿐 아니라 양들을 통해 드러나는 그분의 냄새도 알아차릴 준비를 해야 한다.

성직자들의 권위주의는 이미 너무 오래되었지만 해결의 기미가 그다지 보이지 않는 진부하고 지루한 주제다. 사제들의 권위주의는 갑작스레 나타난 것도 아니고, 가톨릭교회의 콘스탄티누스 전환 이후 권력화 된 교회 안에서 수시로 출몰하는 유령 같은 것이었다. 이에 대한 반동으로 은수생활과 수도 전통이 발생하고, 아시시 프란치스코를 따르는 탁발 수도회도 출현했다.

그렇지만, 권위적인 교회 구조가 바뀌지 않는 한 사제들 개인에게 ‘권위주의 청산’을 주문하는 것은 공염불에 지나지 않는다. 그것은 교회 공동체 전체가 비상한 결단을 통해 구조를 뒤바꿈으로써 시작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점에서 괜스레 사제들에게 죄책감과 자책의 빌미를 던져주는 것은 오히려 사제생활을 위축시키고 불편하게 만들 위험조차 있다.

오히려 다른 주문을 사제들에게 하고 싶다. 실상 사제들의 권위주의는 복음적 열정의 상실에서 온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첫 방문지였던 이탈리아 남단의 항구 람페두사에서 죽어가는 난민들을 바라보며 “누가 이들을 위해 울어 줄 것인가?” 물었다. 그리고 ‘(이웃에 대한) 무관심의 세계화’를 한탄했다.

그러나 한국교회에서는 ‘복음적 열정에 대한 무관심의 교회화’를 한탄해야 한다. 복음은 사제들에게 ‘섬김을 받으러 온 분이 아니라 섬기러 오신 분’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동료 제자들과 군중들에게 “이제는 너희를 종이라 부르지 않고 벗이라 부르겠다.”고 말한 분을 전하고 있다. 그분은 공생활 벽두에 이사야 예언서를 통해 가난한 이들에게 우선적으로 선포된 복음을 전했다.

이러한 복음에 대한 각성을 자기 몫으로 진지하게 받아들이지 못할 때, 우리는 주교와 사제들에게 ‘신앙 없음’과 맡겨진 백성들에 대한 직무 유기를 따져 물을 수 있다. 결국 성직자 권위주의의 문제는 복음에 대한 민감성의 문제다. 복음에 대한 민감성이 부족한 사제들은 ‘자기중심적 태도’에 머문다. 유아처럼 ‘엄마’이신 성모 마리아에게 중요한 결정에 대한 처분을 맡기면서, 아이들처럼 ‘누릴만한 권리’에 집착한다.

사목 직분이 이들에게는 ‘대장놀이’를 행하는 일종의 ‘놀이터’가 된다. 아니면 기본직무만 수행하고, 카메라와 오디오 앰프와 식도락과 자동차와 골프 등 취미생활에 몰두한다. 이 문제를 적절히 깨우쳐 준 사람이 ‘교황/교종’이라는 사실은 놀랍기만 하다. 사실상 교회권위의 최고 정점에 있는 사람이 ‘바닥의 마음’으로 복음을 다시 일깨우기 때문이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강론과 강연, 교황권고를 통해 주교와 사제들에 대한 질타를 아끼지 않았지만, 수도자와 평신도들에 대한 비판은 가급적 자제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는 성직자들이야말로 먼저 ‘복음’의 진실을 알아듣고 백성을 돌봐야 할 일차적 직무자이기 때문일 것이다. 예전에 부산교구 가톨릭대학에서 나온 책자에는 사제를 ‘교회의 심장’이라고 표현했다. 그렇다면 심장이 상하고서야 몸(교회)이 온전할 리 없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