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 4.3항쟁을 새기며 평화를 빌다
4.3 추모미사 강론(2024년 4월 6일_청계광장)
전주교구 김주남 베드로 신부입니다. 보시다시피 초짜 애송이 신부죠. 유학 대기 중에 정동 프란치스코 회관에서 머물고 있는데, 우리 양두승 미카엘 신부님께서 권유를 해주시기에 주제도 모르고 강론하겠다고 나섰습니다. 그게 어제였고 저는 덕분에 후회로 가슴을 치며 새하얀 밤을 보내고 방금 전 제 탓이요 제 탓이요 라고 다시 한번 마지막으로 가슴을 치며 반성을 하게 되었습니다.
언젠가부터 이 역사와 시민사회 공동체, 그리고 이 지구에 빚진 마음을 갖고 살고 있습니다. 복되게도 저는 광주 가톨릭대학교를 다녔고. 그로 인해 누릴 수 있던 것이 참 풍요로웠습니다. 무엇을 누렸는가? 광주가톨릭대학교는 관구 신학교입니다. 전라북도의 전주교구, 전라남도와 광주광역시를 포함하는 광주대교구, 또 제주도의 제주교구 형제들이 함께 모여 공부하며 사제직을 준비했고, 최근에는 부산 가톨릭대학교가 사정상 폐교하게 되면서 경상남도의 마산교구 형제들까지 합류 하게 되었습니다. 덕분에 함께 몸 비비며 살았던 형제들이 기념하는 여러 근현대사의 아픔들을 덩달아 기념하는 기회를 누렸던 것 같습니다. 어느 때가 되면 광주신학교에는 엄숙해지는 계절이 찾아오는데, 이 아름답고 잔인한 계절 봄이 그렇습니다. 4월엔 제주 4.3. 그리고 진도 앞바다에 침몰했고 목포에 거치되었던 세월호의 4.16. 그리고 5월의 광주... 뭐... 전라북도는 뭐 없냐고 하면... 3월 트루먼 독트린에 이어 6월 정읍 발언도 한반도 분단의 시작점이라는 점에서 비극이라면 비극일까요?
전라북도엔 대표적으로 군산이 있죠. 군산은 참 아픔이 많은 동네입니다. 제 고향이기도 하구요. 일제 수탈의 아픔이 남아있으면서, 새만금과 대기업 진출이라는 거짓된 신화들로 끊임없이 희망과 절망을 담금질 당해야 했던 세월이 30년 가까이 흘렀습니다. 새만금과 더불어 굉장한 미래가 찾아올 거라고, 찬란한 비전을 제시했지만, 결과는 늘 배신으로 돌아왔던... 새만금은 절멸의 땅이 되어버렸고 대기업들이 줄줄이 떠나가면서 도시 전체가 회색빛으로 변하는 것을 저는 체험했습니다.
이건 저희 아버지 이야기이기도 하죠. 대우자동차를 다니시다가 IMF때 회사가 부도가 나면서 GM으로 팔렸고, 저는 인천에서 군산으로 이사를 오게 됩니다. 그리고 2018년 결국 회사가 철수하면서 순식간에 아버지는 일자리를 잃게 되셨죠. 단순히 일자리만 잃으신 게 아니라. 모든 관계까 뒤틀리시는 경험을 하게 됩니다. 눈 떠보니 하루아침에 관계하던 대부분의 사람들이 실업자 신세인 것입니다.
대기업에 의존도가 높은 지역에 그 기업이 빠져버리니 지역 전체가 휘청휘청하는 게 눈으로 보일 정도였습니다. 도시 전체가 우울한 숨을 쉬는 것으로부터 저도 자유롭지 못했고 그 우울한 공기가 저를 키운 것도 사실입니다. 아직도 저에겐 제 마음의 건강을 묻는 군산 보건소의 연락이 드문 드문 오곤합니다. 그런 도시죠. 군산은... 제가 말씀드리고 싶은 것은 그 땅이 내쉬는 숨과 땅의 아픔과 우리의 인격, 인간성이 무관하지 않다는 것입니다. 토양으로부터 배우는 게 분명히 있다는 것입니다. 광주도... 제주도...
아무튼, 다시 광주의 땅으로 돌아와 광주가톨릭대학교로 돌아와서 그때가 되면! 그 잔인한 달이 되면! 우리 선배님들, 가만히 있지 않았습니다. 글들을 써 대자보에 올리고, 문집을 만들고, 퍼포먼스를 준비하고, 노래를 부르고, 영화를 상영하고, 당일 저녁이면 희생자들을 기억하는 공동 로사리오를 열고 그랬거든요. 뿐만 아니라, 그런 토양 위에서 신학을 하는 이들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자연히 용산, 강정, 쌍용, 밀양, 성주 최근에는 삼척, 팔현과도 같은 문제에 자연스럽게 노출되고 관심을 갖게 되는 가능성이 높아지는 것도 사실입니다. 그게 제가 누린 특권이라고 할 수 있겠죠.
제가 신학교에 입학하던 해 2012년은 한창 강정이 화두였던 때였습니다. 문정현 신부님께서는 테트라포트에 추락하시기도 했고, 거리 미사 중에 경찰에 의해 성체가 짓밟히는 사건도 발생합니다. 결국 구럼비 발파작업은 시작되었고 다음날 신문 일면을 장식한 발파 장면을 보며 엉엉 울었습니다. 방학 중엔 강정에 가서 거리 미사에 참석하고 오후엔 강정천에 몸 담가 물장구치고 놀며 형제들과 맥주 한 캔 했던 추억이 참 아름답게 남아있습니다. 저는 개인적으로 제주교구 형제들과의 우애가 깊었습니다. 제주도 형제들은 뭐만 했다 하면 “아이고 저 육지 것들... 또 저러신디” 그렇게 애정을 섞어서 혀를 차곤 했는데... 실은 그 ‘육지 것들’이란 속어가 형제들 입에 붙기까지 그 부모의 부모 세대 이상까지의 경험이 녹아있는 상당히 아픈 역사를 가지고 있는 것을 알게 되었죠.
특별히 저도 참 잘 지냈던 제주교구 부재환 프란치스코 신부님, 신부님께서는 석사 논문에서 제주 4.3과 강정을 연결하는 작업을 하셨죠. 제주 4.3이 과거에 그친 일이 아니라, 오늘날엔 강정이라는 모습으로, 제2공항이라는 모습으로 계속 변형되며 그 역사를 이어가고 있다 하셨습니다. 그리곤 방학이면 저를 강정으로, 제주 평화공원으로 관덕정, 송악산 동굴들로, 알뜨르 비행장으로 항몽유적지로 데려다 주시곤 하셨습니다. 그래서 저는 제주라는 땅을 아름답지만 시린 공간, 추모의 공간으로 기억합니다.
신부님께서 저에게 누누이 말씀해주셨던 것은 제주도민들의 정체성에 저항과 순응의 역사가 있다는 것이에요. 억압과 수탈에 맞서 저항했던 제주 민중의 역사가 있어요. 몽고에 항거했고, 탐관 오리들의 만행에 민란으로 저항했고, 프랑스, 일제의 폭압에 항거했고, 해방이후 미군정에 항거했던... 그렇지만 늘 짓밟혀 왔고, 특히 4.3은 그 악랄함과 광범위함에 있어 추종을 불허할만한 사건이었던... 짓밟혀도 너무 처참히 짓밟혀 버린 사건이라고 말씀을 하셨어요.
그리고 이어진 순응의 역사... 이 순응이라고 한다면 일단 섬이라는 척박한 환경에 적응하기 위해 대 자연앞에 겸허해야했던... 동시에 여섯가지 고역이라 하죠. 해조류와 패류를 바쳐야 하는 ‘잠녀역’(해녀역), 전복을 바쳐야 했던 ‘포작역’(鮑作役), 말을 바쳐야 했던 ‘목자역’(牧子役), 귤을 바쳐야 했던 ‘과원역’(果員役), 이런 진상품을 잘 운반해야 하는 ‘선격역’(船格役), 그리고 관청의 땅에서 노동해야 하는 ‘답한역’(畓漢役)과 같이 안 그래도 빠듯한 삶에 진상해 올릴 것들을 따로 떼어놔야 했고, 각종 부역에 시달리는, 각종 수탈 앞에서 어떤 저항할 힘도 내지 못하는, 비굴하게 고개숙일 수 밖에 없었던 역사들이 계속되었던... 그러한 것들이 제주도민의 아이덴티티에 아프게 자리 했다고 그래요. 일종의 강요된 순응인 것인데, 그것이 4.3이후로 레드콤플렉스, 연좌제로, 옥살이로, 제줏말로 ‘속솜’해야만 했던! 침묵해야했던! 그 세월이 실은 오늘까지도 계속되고 있는 현재진행형인 것이죠.
강우일 주교님께서 처음 제주교구장이 되어 내려가셨을 때, ‘참 평화롭고 좋은 섬이다. 그간의 서울에서의 고생을 여기서 보상받는구나’ 하셨는데, 차츰 차츰 도민들의 증언을 듣다 보니... 대한민국의 유래없는 대학살이 있던 곳이고, 그 트라우마적인 경험이 할머니 할아버지들 입을 다 틀어막아서, 제주도에서 40~50년 살았음에도 제주의 중장년층들이 4.3에 대해 알고 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것이 너무나 놀라운 사실이었다고 하시죠. 그 중장년 층의 부모세대가 알려주지 않은 것이에요. 말 할수 조차 없고, 말해서 자식들에게까지 그 아픔이 옮길까봐, 피해가 있을 까봐 입도 뻥끗 할 수 없이 당사자 혼자 까맣게 삭혀야 했던 세월이 자그마치 50년이라는 것인...
지금까지 4.3을 가지고 사건이라고 해야하는지 항쟁라고 해야하는지, 4.3 뒤에 어떤 명사가 붙어야 하는지 제대로 명명되지 못하고 있는 것 자체가 보여주는 것은... 조심스럽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참혹한 사건을 그 누구의 입장에 가져다 대어도 누구도 승자일 수 없고, 그 어느 입장도 무죄한 양민의 희생을 대변해 줄 수 없기 때문에. 무장대든, 토벌대든, 100% 피해자 입장, 100% 가해자 입장을 명확히 갈라 낼 수 없고, 그 점에서 모두가 이념 갈등의 소용돌이 속에서 인간성의 크게 피해를 입은 희생자이기 때문에...
그런 점에서, 우리는 자비를 이야기할 수 있습니다. 윤공희 대주교님의 말씀 중에. 1984년, 광주 학살이 있고나서 4년 뒤에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 광주를 방문하셔서 하시는 말씀이 ‘용서’였다고 합니다. 나중에 시민들은... “아, 책임자들은 잘못하고 사과도 안 했는데 어떻게 용서하느냐?”고 했지만, 교황님 말씀이 그래요. “용서는 우리가 그 사람을 미워하거나 원수 갚을 생각을 하지 않는 거고, 정의에 대한 요구를 포기하라는 뜻은 아니다. 정의를 세워가면서 용서를 계속 할 수 있고 또 해야 한다.”
어찌보면 가장 용서야 말로 가장 큰 복수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지난번 3.1 위안부 미사 후에 광화문 앞을 행진하면서, 보수 주의자 할아버지, 할머니들이 욕지거리를 하고 주먹으로 때릴 듯이 쫓아오려고 했어요. 그런데 참 재밌는 것은 우리는 그러면 그럴수록 더욱 즐겁게, 미소로 화답하며 풍물소리를 울렸던 그런 모습이, 폭력을 폭력으로 대하지 않고, 관용으로 대하는 그렇지만 정의는 부르짖는 아름다운 모습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그 참혹하고 처절한 십자가 죽음을 겪고나서 돌아오셔서 하시는 말씀이, “자, 죽창을 들어라. 복수를 시작해보자”가 아니라. 평화를 빌어주셨다는 것이 인상 깊습니다. ‘가운데에 서셨다’라는 표현도 참 아름답죠. 죽음의 그림자가 가득 드리운 그 한 가운데, 예수님께서는 평화의 상징으로 서신다!
이 잔인한 달 4월... 사순과 부활의 교차 지점에서. 교회가 줄 수 있는 메시지는 예수님과 마찬가지로 결국 평화일 것입니다. 팍스 로마나(Pax Romana)로 대표되는 힘의 논리에 의해 강요된 평화가 아니라, 예수님의 평화, 두려움과 상처를 넘어서, 치유하시는 평화, 상처를 외면하는 평화가 아니라 상처에 깊이 공감하고 함께 상처를 입은 이(상처입은 치유자)로서 선포하시는 평화가 우리의 역할이고, 그 평화가 선포될 때, 오늘 복음에서처럼 두려움 속에 갇혀서 침묵할 수 밖에 없었던 제자들이 기쁨에 찼다고 나오듯이, 우리 또한 참된 용서와 평화의 기쁨으로 나아가게 될 것입니다. 비단 4.3뿐만 아니라 같은 이념 갈등의 굴레 안에서 고통을 겪고 있는 이들의 마음에 깊이 공감하고, 그들 가운데 파고 들어가 평화의 사도로 자리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할 수 있는 추모이고, 또 폭력을 폭력으로 갚지 않는 온유한 복수이며, 4.3이 후대에 전해줄 수 있는 인권, 존엄, 평화의 메세지가 아닐까 생각합니다.
아무쪼록, 평화를 바라는 우리의 노래가 청계에 흘러 한강으로 흐르고 거기서 다른 목소리들과 만나 서해로 흐르고 또 전세계로 흐르길...
정의가 강물처럼 흐르고, 서로를 위하는 마음이 개울같이 넘쳐 흐르길...
이 시간 함께 기도하셨으면 좋겠습니다.
전주교구 김주남 베드로 신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