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의 자손 마르티누스
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31
어느날의 창세기
-고정희
해가 서쪽에서 동쪽으로 지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강물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거스르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산들이 마을로 무너지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나무들이 뿌리를 창궁으로 치켜들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생명 있는 것들의 너그러움
부드러운 흙가슴의 너그러움
공기의 너그러움
천체 운행의 너그러움일 거야
별들이 저마다 주어진 길을 돌고
바람이 측백의 어린 가지를 키우듯
핏물이 밥사발에 범람하지 않는 것은
일종의 너그러움일 거야
세계인의 신음소리가 하늘을 덮지 않는 것은
일말의 너그러움일 거야
돌들이 일어나 소리치지 않는 것은
너그러움일 거야
어머니가 방생한 너그러움
임신한 여자가 담보 잡힌
너그러움일 거야
등뼈를 쓰다듬는 너그러움
살기를 풀어내는 너그러움
아아 우주의
너·그·러·움·일·거·야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거든 너희보다 먼저 나를 미워하였다는 것을 알아라. 너희가 세상에 속한다면 세상은 너희를 자기 사람으로 사랑할 것이다. 그러나 너희가 세상에 속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내가 너희를 세상에서 뽑았기 때문에, 세상이 너희를 미워하는 것이다. ‘종은 주인보다 높지 않다.’고 내가 너희에게 한 말을 기억하여라. 사람들이 나를 박해하였으면 너희도 박해할 것이고, 내 말을 지켰으면 너희 말도 지킬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 이름 때문에 너희에게 그 모든 일을 저지를 것이다. 그들이 나를 보내신 분을 알지 못하기 때문이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말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자기들의 죄를 변명할 구실이 없다. 나를 미워하는 자는 내 아버지까지 미워한다. 일찍이 다른 그 누구도 하지 못한 일들을 내가 그들 가운데에서 하지 않았으면, 그들은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들은 내가 한 일을 보고 나와 내 아버지까지 미워하였다. (요한 15,18-24)
이단(異端) 안에도 복음이 있다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와 마르틴 루터를 비교하는 것이 가능할까? <하느님의 엄청난 모험>을 쓴 왈벗 뷜만은 이 두 사람이 ‘성서를 읽고 깜짝 놀라서 자기 삶의 기본 설계로 삼은 점, 구세주 예수를 위하여 조건 없는 결단을 내린 점’을 들어서 비슷하다고 말했다. 한편 이들은 교회에 대한 입장에서 서로 달랐는데, 프란치스코가 교회 안에서 가장 많은 공감을 얻어낸 화해와 일치의 인물인 데 반하여, 마르틴 루터는 교회의 분열을 낳은 가장 논쟁적인 인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두 사람의 역사적 배경은, 중세교회의 교권적 권위주의와 귀족주의에 빠져 있던 교회에 도전했던 이단운동에서 찾을 수 있다. 여기서 프란치스코는 민중적 이단운동에 큰 영감을 주었으며, 루터는 반(反) 교권적 이단운동에 영향을 주었다. 그 결과 프란치스코는 교회에 ‘청빈’이라는 덕목을 뿌리내리게 하였으며, 루터는 결과적으로 교회를 갈라놓았다. 그러나 루터가 처음부터 교회를 분열시키려 했던 것은 아니었다는 점을 기억할 필요가 있다.
중세가 끝나갈 무렵 가톨릭 교회는 바티칸과, 군주처럼 사는 주교들의 저택, 본당과 수도원에 이르기까지 온통 권력남용과 방종한 생활이 이루어져 복음적으로 살기에는 거의 절망적인 지경이었다. 이럴 때에 예수님의 제자공동체와 초기 그리스도교의 삶을 그리워하며, 참된 그리스도인으로서 복음에 따라 가난과 헌신으로 살고자 했던 사람들이 으레 등장하기 마련이다.
이런 사람들의 복음적인 생활방식은 돈 많고 힘센 교회의 살 속에 가시를 박는 꼴이 되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 가시들을 뽑아버리려고 갖은 구실을 다 만들어 내었다. 그들의 성서 해석에서 ‘오류’를 찾아내어 그들을 ‘이단자’로 선언하고, 곧 이어 화형장으로 끌고 갔다. 이런 위험조차 무릅쓰고서 교회사 안에 거듭 ‘이단자’들이 나타났다는 것은 복음의 불길이 교회 안에서 결코 꺼져버릴 수 없으며, 새로움을 주는 성령이 아예 사라져 버리지 않으리라는 것을 말해준다. 이들은 교회가 거듭나도록 길을 닦는 사람들이었던 것이다.
비텐베르크 복음서
마르틴 루터 (Martin Luther 1483-1546) 는 교회의 악덕(惡德)에 도전하기 전에 자신의 영혼이 겪는 고뇌를 먼저 극복해야 했다. 아우구스티노 은수자 수도회에 입회하고, 사제로 서품받고, 신학박사가 되었으며, 신학강의를 하고 수도공동체의 장상직을 맡았지만 루터는 죄에 대한 불안과 하느님의 심판에 대한 공포로 무서운 괴로움을 겪었다. 이 두려움으로 고해실을 들락거렸지만 마음은 언제나 개운치 않았다.
프레몽트레 수도원장 마스코프에게 보낸 그의 편지에는 “고백하건대 저는 날로 더 나빠지며 더 비참해지고 있으므로 저의 삶은 날이 갈수록 지옥에 가까워지고 있습니다.”라고 쓰고 나서 편지 끝에 “낙원에서 쫓겨난 아담의 자손 마르티누스”라고 서명했다. 이를 두고 어떤 전기 작가는, 루터를 정신병자로 몰아간 적도 있지만, 실제로는 ‘신비가’에 가깝다고 보는 게 옳다. 루터는 온 인류가 처한 죄스런 상황에 고통스러워했던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 베풀어 주는 성사(聖事)들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루터는 성서를 읽다가 불현 듯 빛을 보았다. 로마서(4,5)의 “그러나 아무 공로가 없는 사람이라도 하느님을 믿으면 믿음을 통해서 하느님과의 올바른 관계를 얻게 됩니다.”라는 구절이 새로운 계시(啓示)처럼 깨달음을 주었던 것이다. 그후 루터에게는 징벌하고 심판하시는 하느님이 아니라, 우리를 의롭게 하심으로써 당신 의로우심을 알려주는 그런 하느님이 열쇠말씀이 되어주었다.
이런 생각을 루터는 비텐베르크 대학에서 성서 강의를 하면서 신명나게 가르쳤다. 학생들은 이 새로운 노선을 얼른 알아차렸고 또 높이 평가했다. 청강생 수가 200명에서 600명으로 늘어난 것이다. 1515/16년에 나온 <로마서 주해>는 그의 신학 발전에 기본 잣대가 되었다. 믿음과 의로움으로 새로 싹튼 신학은 처음부터 교황청에서 추진하던 대사부(大赦符) 판매사업과 충돌하였다.
대사(大赦)란 이교도였던 게르만족의 보상 원리에서 나온 것인데, 범죄를 저지르면 그 동족이나 친척 가운데 어떤 사람이 대신 속죄함으로써 죄에 대한 벌을 용서받을 수 있는 것으로 이러한 관행이 교회에 들어온 것이다. 그래서 자기 자신을 위해서나 혹은 ‘불쌍한 영혼’을 위해서 교회에 돈을 갖다 바치면, 속죄해야 할 죄의 벌을 없애거나 줄일 수 있었던 것이다. 사람들은 “돈이 상자에 떨어지자마자 영혼이 연옥에서 뛰쳐나온다.”라고 했다.
로마는 이런 장사를 부추기고 있었는데 이렇게 하여 베드로 대성당의 건설 계좌로 돈이 흘러 들어오고 있었기 때문이다. 루터는 거룩한 분노로 이에 대항했다. 하느님과 인간이 돈을 갖고 거래할 수 있다는 그릇된 생각을 용납할 수 없었다. 1517년 10월 31일, 그는 이 문제를 공개 토론에 돌리고자 95개 명제를 주제별로 묶어서 비텐베르크 성채 교회의 성문에 내다 걸었다.
단죄, 단죄, 단죄하라
라틴어로 쓰여진 루터의 명제들은 번역되고 베껴쓰고 복제되고 인쇄되어 처음에는 비텐베르크에서, 다음에는 뉘른베르크 · 라이프치히 · 바젤로 퍼져 몇 주 사이에 온 독일에 두루 나돌게까지 되었다. 그 첫째 명제는 “우리의 주님이시며 스승이신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회개하라.’ 는 말씀으로 신자들의 삶이 속죄의 삶이기를 원하셨다.”는 것이다. 또한 참된 속죄는 지옥에 대한 불안이 아니라 하느님의 사랑에 감사하는 응답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느님의 자비인 교회의 은사는 돈에 팔리는 것이 아니라 거저 주어지는 보물이라고 말했다. “대사부가 없더라도 참된 그리스도인은 누구나 은총의 보화에 동참할 권리가 있다.” (명제 37) 라거나 “이 보화는 하느님의 영광과 은총의 복음이다.” (명제 62)라고 말했다. 이 말에 프란치스코회 수도원장 플레크는 열렬히 호응하는 편지를 보냈다.
루터의 주장은 복음에 비추어 흠이 없었다. 만약 루터가 프란치스코처럼 겸손한 태도로 이런 주장을 위대한 교황 인노첸시오 3세 앞에 내놓았던들 별 문제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루터가 자기 주장을 성문에 내다 붙이는 과격한 행동은 도발적이었으며, 당시의 교황이었던 레오 10세는 그릇이 그다지 크지 못했다. 교황은 낯선 수도자가 백성들을 선동하기 위해서 불순한 대자보를 붙였다고 여겼다. 그래서 바티칸 궁전의 자기 신하들과 더불어 방어적인 자세로 루터를 단죄하였다.
루터의 주장이 교리에 어긋나는 점이 별로 없었지만, 교황청은 문제 제기에 대한 아무런 답변도 없이 루터를 처벌하는 데 급급했다. 거기에는 교회의 이익 문제가 걸려 있었던 것이다. 또한 교황의 죄를 용서할 권리를 왈가왈부하는 것은 무엄한 짓이었던 것이다. 결국 1518년에 루터는 파문을 당했고, 나중에는 수도회에서도 또 황제에 의해서도 추방을 당했다.
언론이 차단되고 신변의 위협을 느낀 루터는 마침내 ‘자신의 의견을 철회함은 곧 이단자가 되는 길’이라면서 양심선언을 하였다. 루터의 말투는 더욱 거칠어졌고 교황직과 함께 교회 안에 반(反) 그리스도가 들어왔다는 표현까지도 서슴지 않았다. 교황청이나 루터의 이런 완강한 태도는 모두에게 불행이었으며, 교회의 분열을 낳는 길이 되고 말았다.
루터는 종교개혁자인가, 교회분열자인가
루터는 먼저 하느님이 무엇보다도 성서를 통해서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주장했으며(sola scriptura), 교계제도와 교도권의 양식문을 그다지 중요하게 여기지 않았다. 또한 오로지 믿음으로(sola fide) 의로움이 이루어진다고 강조하였다. 율법은 우리를 노예화하고 그리스도의 은총은 우리를 해방하며 우리는 끊임없이 실패를 거듭하므로 율법은 우리를 고발하고 그리스도께 대한 신앙은 우리를 의롭게 만든다는 게 루터의 확신이었다.
“하느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를 통해서 모든 사람을 죄에서 풀어주시고 당신과 올바른 관계를 가질 수 있는 은총을 베풀어 주셨습니다.” (로마 3,24) 그러므로 복음은 정말 기쁜 소식이며 단지 정보가 아니라 약속이며, 그리스도를 새로운 모세(입법자)로 삼는 것은 복음을 왜곡하는 것으로 보였다. 그 결과 선업(善業) 교리와 대사(大赦) 교리 그리고 은총이 아니라 의무처럼 여겨졌던 성사(聖事) 가 의미를 잃어버렸다.
한편 루터는 신도들을 억압하는 교회 구조에서 해방되기를 바랐다. 루터는 로마와의 분쟁과 분열보다 먼저 쇄신을 요구했다. 그래서 처음엔 신뢰에 찬 태도로 교황에게 편지를 썼다.
“교황 성하, 성하의 발 앞에 엎드려 저의 있는 그대로와 가진 모든 것을 다하여 청하오니, 살리든 죽이든 소환하든 철회하든 인가하든 기각하든 성하께서 결정하시는 그대로 하소서. 저는 성하를 통하여 교회를 인도하시고 성화를 통하여 말씀하시며 인정해 주시는 그리스도의 목소리로서 성하의 목소리가 되겠습니다.”
그러나 그처럼 친절히 내민 손을 로마가 그다지도 거칠게 막아버리자 루터도 자기 신앙의 확신을 옹호하면서 덫에 걸린 사자처럼 힘을 부리며 반격으로 넘어갔던 것이다. 그는 교회가 “선택된 민족이고 왕의 사제들” (1베드로 2,9) 임을 부정하지 않았지만 실제로 살고 있는 그대로의 성직 위계질서가 복음에 맞는다고 여기지는 않았다. ‘교종과 주교들과 수도자들은 그리스도를 믿지 않고 거룩하게 살지도 않으며 못되고 수치스런 악마의 족속’이라고 비난했다. 그뿐 아니라 루터는 때가 무르익은 쇄신작업을 직접 단행하였다. 미사를 모국어(독일어)로 바치고 평신도들이 성배에 참여하고 호사스런 사제들의 복장을 폐지하였다. 또한 성사를 세례와 성찬례 두 가지로 줄였는데 이런 조치는 지금 생각해 볼 때 별로 바람직하지 않은 것이지만 성사가 남용되던 당시를 생각해 볼 때 불가피한 것이었다.
결국 루터는 고양이 목에다 방울을 달았을 뿐이었다. 그러나 애석하게도 로마 교황청은 대화와 쇄신 대신에 논쟁을 택했고 그후 가톨릭 교회와 프로테스탄트 교회는 반목과 갈등, 적대감을 키워왔다. 아무튼 가톨릭 교회는 이제 루터를 단죄하기에 급급했던 ‘반동 종교개혁’의 단계를 극복했고,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루터가 처음 주장했던 내용을 꽤 많이 받아들였다. 예컨대 모국어로 거행하는 전례를 허용했고, 성체와 성혈의 양형 영성체를 다시 도입했으며, 성서를 높이 평가했고, 교회를 하느님의 백성으로 바꾸어 불렀으며, 양심의 자유를 인정한 것이다. 루터의 주장은 승인되었지만 교회는 갈라진 상태이다.
복음을 가르치면서도 거부하는 교회
가톨릭교회나 프로테스탄트나 모두 그리스도의 복음을 받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세상이 그리스도인들을 미워했듯이 (요한 15,18), 그리스도교회는 역사적으로 다른 그리스도교인들을 대적하여 헐뜯고 싸우고 미워하였다. “세상에 속하지 않았을뿐더러 오히려 내가 세상에서 가려낸 사람들” (15,19) 이라고 그리스도께서 친히 말씀하셨던 사람들이 스스로 그분이 주신 복음을 저버리고 권력을 취함으로써 서로 갈라서게 된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종은 그 주인보다 더 나을 수가 없다.” (15,20) 라고 하셨지만, 모두가 주인이 되려고 했기 때문에 분쟁이 생긴 것이다. 교리서의 내용 한 획 한 획을 그리스도께서 일일이 가르쳐 주신 것도 아닌 터에 자신들이 정한 해석만이 옳다고 주장함으로써 교회 안에서 주도권을 누리려는 못된 심보가 교회의 일치를 깨뜨렸으며, 세상의 모습에 견주어 만들어진 교회 권력구조를 복음적으로 평등하게 바꾸기를 거부하는 태도가 교회 분열을 일으켰다.
그들은 지금도 저마다 복음을 가르치지만 복음을 제대로 살지 못하면 그 복음이 그들을 하느님께 고발할 것이다. “내가 와서 그들에게 일러주지 않았던들 그들에게는 죄가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는 그들이 자기 죄를 변명할 길이 없게 되었다.” (15,22) 하물며 교회가 교회쇄신을 바라는 비판자들을 교회 밖으로 쫓아내고 매장시키려 한다면 그 교회는 이미 그리스도의 교회가 아닐 것이다. “사람들은 너희를 회당에서 쫓아낼 것이다. 그리고 너희를 죽이는 사람들이 그런 짓을 하고도 그것이 오히려 하느님을 섬기는 일이라고 생각할 때가 올 것이다.” (16,2) 일이 이 지경에 이르면 불행한 일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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