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다운 사랑, 루틸리오 그란데
육교를 건너며
-김정환
육교를 건너며
나는 이렇게 사는 세상의
끝이 있음을 믿는다.
내 발바닥 밑에서 육교는 후들거리고
육교를 건너며 오늘도 이렇게 못다한 마음으로
나의 이 살아있음이 언젠가는 끝이 있으리라는 것을
나는 믿고
또 사랑하는 것이다
육교는 지금도 내 발바닥 밑에서 후들거리고
견딘다는 것은 오로지 마음 떨리는 일
끝이 있음으로 해서
완성됨이 있음으로 해서
오늘, 세상의 이 고통은 모두 아름답다.
지는 해처럼
후들거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어제처럼 의심하며 살 것이며
내일은 후회없이
맡겨진 삶의 소름 떠는 잔칫밤을 치룰 것이다
아아 흔들리는 육교를 건너며
나는 오늘도, 이렇게 저질러진 세상의
끝이 있음을 믿는다
나의 지치고 보잘것 없는 이 발걸음들이
끝남으로, 완성될 때까지
나는 언제나 열심히 살아갈 것이다
예수님께서 다시 이르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나는 양들의 문이다. 나보다 먼저 온 자들은 모두 도둑이며 강도다. 그래서 양들은 그들의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문이다. 누구든지 나를 통하여 들어오면 구원을 받고, 또 드나들며 풀밭을 찾아 얻을 것이다. 도둑은 다만 훔치고 죽이고 멸망시키려고 올 뿐이다. 그러나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넘치게 하려고 왔다. 나는 착한 목자다. 착한 목자는 양들을 위하여 자기 목숨을 내놓는다. 삯꾼은 목자가 아니고 양도 자기 것이 아니기 때문에, 이리가 오는 것을 보면 양들을 버리고 달아난다. 그러면 이리는 양들을 물어 가고 양 떼를 흩어 버린 다. 그는 삯꾼이어서 양들에게 관심이 없기 때문이다. 나는 착한 목자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내 양들은 나를 안다. 이는 아버지께서 나를 아시고 내가 아버지를 아는 것과 같다. 나는 양들을 위하여 목숨을 내놓는다.(요한 10,7-15)
“아길라레스의 장엄한 새벽녘이었다. 군대가 마을을 둘러싸고 교회를 공격했다. 탱크 한 대가 교회 문턱에 다가서 있었다. 교회 안에는 사제 3명과 농민 3명이 있었다. 우리는 주민들에게 도움을 청하기 위하여 안절부절못하면서 종을 울리고 있었는데, 그때 총을 든 병사들이 종탑으로 밀고 들어와 농민 한 사람을 쏘았다. 우리는 포승에 묶여 계단을 끌려 내려왔다. 온통 고함소리, 총소리, 창문 깨지는 소리가 뒤범벅되고 있었다. 성체(聖體)들이 사방에 흩뿌려졌고 제대는 난사된 총탄으로 얼룩졌다. 우리들은 거의 벌거숭이가 된 채 머리를 숙이고 교회 뒤뜰에 내던져졌다. 우리는 총에 맞은 사람에 관해서 더 알 길이 없었다. 공포가 시 전체를 뒤덮었던 것이다.”(페니러녹스, 「민중의 외침」, 분도출판사, 85쪽)
커피가 사람을 먹는다
1977년 5월의 엘살바도르 아길라레스 공격은 이렇게 시작되어사. 군부가 ‘루틸리오 작전’이라고 부른 이 포위공격은 신속하고 무자비한 것이었다. 공격이 시작된 지 한 시간 만에 2천 명의 정부군은 마을의 전선을 끊고 학교‧철도‧주유소‧교회를 점령했다. 군대와 경찰은 탱크‧비행기‧최루가스를 이용하여 5백 평방마일의 지역을 봉쇄한 다음 집집마다 수색했다. 당시 교회소식통에 의하면 3백50-4백여 명이 피살된 것으로 추정된다. 피살자의 대다수는 비무장 농민이었으며, 사제들은 과테말라 접경지역으로 끌려가서 추방당했다. 그들은 저지른 죄악이란 토지 없는 농민들이 노동조합을 결성하려는 것을 지원했다는 것이다.
엘살바도르에 커피를 재배하는 플랜테이션 방식이 들어온 뒤 부유한 지주들은 농민들의 땅을 강탈하였다. 자기 농토로부터 쫓겨난 농민들은 “커피가 사람을 잡아먹는다!”며 고통에 차서 울었다. 한편 그렇게 드넓은 땅을 차지한 독재자들의 아들과 손자들로 이루어진 ‘14대 가문’은 산살바도르 시내에서는 대저택을, 산간에는 호숫가의 별장을, 대농장에는 식민지 시대의 농장저택을 가지고 6,7명의 상주 하인들을 거느리면서 계속 화려하게 살고 있다.
산베니토라는 산살바도르 북부 부유층 거주지역에는 잘 가꾼 잔디밭이 깔린 드넓은 비벌리힐이 있다. 또한 수영장을 갖추고 수정 샹들리에로 치장된 대리석 궁전에는 유럽의 미술품과 수입 사치품들로 치장되었다. 한편 반대쪽인 시가 남쪽에는 수많은 가난한 사람들이 진흙벽돌로 만든 셋집에 살고 있으며, 검은콩과 옥수수빵 대신에 치즈 한 조각을 먹거나 구두 한 켤레를 신어도 사치에 속했다. 여기선 언제나 누더기를 걸친 맨발의 어린아이들이 좁은 골목길을 돌아다니며 구걸한다. 이를 두고 부유한 엘살바도르인은 “사람들이 돼지나 다름없기 때문”이라고 덧붙인다. 이들 부유층은 외국에 나가서 공부했지만 “이것은 우리 땅이고 우리는 그 사실을 입증할 총을 가지고 있다.”고 말한다.
산살바도르의 고위성직자인 루이 곤살레스 대주교의 탁월한 영도 아래 교회는 점차 농촌문제에 관심을 가지기 시작했으며, 즉시 지주와 군부로부터 공격을 받았다. 엘살바도르에서 처음으로 구성된 토지개혁회의에 산살바도르 대표로 1970년 파견된 호세 이노센트 알라스 신부는 회의에 가는 도중에 산살바도르 성당 앞에서 4명의 괴한에게 납치당하여 외딴길에서 머리칼을 면도질당하고 납치자들이 어거지로 먹인 약물과 술 때문에 혼수상태에 따진 채 발견되었다. 1972년 1월 2일 찰테낭고의 본당 사제인 니콜라스 로드리게스 신부는 군인과 경찰의 기능을 모두 행사하는 국민방위군 요원에 의해서 체포당했는데 며칠 뒤 참혹하게 갈가리 찢긴 그의 시신이 찰테낭고시 외곽에서 발견되었다. 그 당시 국방상 움베르토 로메로 장군은 스스로 ‘독실한 가톨릭 신자’라고 주장하면서 “이 나라에서 반란 사제들을 청소하겠다.”고 장담하였다.
농민들이 귀를 열기 시작했다
1972년 아길라레스에 예수회 신부 4명이 도착했다. 그 중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는 농민 체질을 지닌 강건한 체격의 얼굴이 넓적한 인물이었다. 두려움 없고 거리낌없는 이 신부는 가난한 사람들로부터 무척 사랑을 받았다. 이들 사제들은 메델린 주교회의의 교육 및 지역 개발 지침에 따라서 아길라레스와 인근 28개 마을에 그리스도교 바닥 공동체를 만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4주일 중 2주일은 가난한 마을 사람들과 함께 먹고 함께 잠을 청했다. 벽지 오두막을 지프차로, 때로는 걷거나 노새를 타고 방문하면서 사업을 펴나갔다.
얼마 후 성과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말씀의 대표자들’이라고 불리던 평신도 지도자들의 도움을 받아 신부들은 농민들을 변화시켜, 그들이 노동조합과 노동권의 옹호와 같은 근본적인 권리를 얻어내도록 격려하였다. 하느님은 만민의 아버지시며, 모든 사람들은 형제자매이고, 그들은 하느님 자신이 거부당하는 처참한 불평등 상태에서 살아서는 안 된다는 ‘기쁜 소식’에 귀를 열기 시작했다. 이런 활동을 보고 지주들이 좋아할 리 없었다. “교회가 계급투쟁을 선동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1977년 3월에 로메로 장군이 부정선거로 대통령으로 선출되었다. 이를 위해 로메로 장군은 ‘오르덴(ORDEN)’이라는 폭력조직에 의존했다. 오르덴이란 ‘질서’라는 뜻이다. 이 치외법권적 기구는 독립적으로 경찰을 통제하며 시골 구석구석에까지 정치적 반대자들을 감시하고 테러를 자행하였다. 이들은 15만 명에 이르는 유령투표자를 등록시켰으며 투표용지를 대량 투입하였다. 이런 뻔뻔스런 선거조작에 항의하기 위해 산살바도르의 리베르타드 광장에서 7천여 명이 평화적 시위를 벌였다. 그러자 군대와 경찰은 광장을 포위하고 해산할 것을 명령했다.
시위 군중 중에서 1천여 명은 광장 옆 엘로사리오 성당으로 피신했지만 거기에도 최루탄이 퍼부어졌다. 한편 미처 교회로 피신하지 못한 인파 가운데 1백여 명이 피살되고 2백 여명이 부상당했으며 5백여 명이 체포되었다. 야당대표였던 클라라마운트는 비행기에 실려 코스타리카로 추방되었고 정부는 비상사태를 선포하였다. 교회에 대한 정부의 보복으로 첫 번째 희생당한 사람은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였다. 신부는 아길라레스 북쪽에 있는 마을인 엘파이스날에 미사를 집전하러 가는 도중에 10대 소년 및 72세 된 농부와 함께 총살당했다.
인권과 정의를 위한 죽음, 루틸리오 그란데
“오늘날 우리들이 당면하고 있는 진정한 문제는 순교의 시기를 맞고 있는 우리나라와 이 대륙에서 어떻게 하면 굳건한 그리스도인이 되는가입니다. 저들은 그리스도교 공동체 출신의 가난한 사제나 선교사들을 어둠을 이용하여 납치할 것이며 죽이기까지 할지 모릅니다. 그리고 얼마 후에는 성서와 복음이 이 땅에서는 용납되지 않을지도 모릅니다. 성서의 모든 페이지들이 체제를 위협하기 때문입니다. 복음은 죄악을 반대합니다. 예수께서 국경을 기로지른다 해도 저들은 그분을 체포할 것입니다. 그분을 법정으로 끌고 가 헌법을 어기고 전복활동을 한 혁명가로 기소할 것입니다. 그리곤 소수에 반대한다는 이유로 그분을 다시 십자가형에 처할 것입니다.
그들이 좋아하는 그리스도는 성물 안치소나 무덤 속에 들어가 있는 그리스도이기 때문입니다. 그런 그리스도는 입에 재갈이 물린 침묵하는 그리스도입니다. 이렇게 우리들의 이기적인 물욕을 따라서 만들어진 그리스도는 복음의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것은 가장 고귀한 인류 구원을 위하여 33세의 나이로 숨진 젊은 그리스도가 아닙니다.… 그러나 기억하십시오. 우리가 여기 있는 것은 증오 때문이 아니라는 것을. 우리는 마체테 칼을 가지고 나오지는 않았습니다. 우리는 카인의 무리까지도 사랑합니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원수가 없기 때문입니다. 우리들이 가진 것은 도덕적인 힘이며 하느님의 말씀입니다. 이런 힘은 저들이 우리를 몽둥이로 때린다고 해도 우리를 단결시킬 뿐입니다.”(루틸리오 그란데 신부)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살해당하자 10만 이상의 민중들이 비상사태를 무시하고 산살바도르 성당에서 열린 장례식에 참석했다. 8명의 주교와 4백 명의 사제가 그 주일에는 전국에서 단 하나의 미사를 올리고 있었다. 교회는 사흘간의 추모기간을 선포하고 이 민중의 사제를 위해서 전국의 모든 교회 종을 울렸다.
한편 ‘백전사(白戰士) 동맹’이라고 자칭하는 우익 야경단 조직이 정부군이 무기를 지급받아 그란데 신부가 소속했던 예수회 사제들에 대한 테러에 나섰다. 이들은 “애국자가 되려면 사제를 죽여라!”는 전단을 뿌리고 엘살바도르에 남아 있는 47명의 예수회 신부들에게 1977년 7월 21일까지 전원 출국하지 않으면 모두 죽여버리겠다고 협박했다. 사제들은 교구청에 은신해야 했으며 예수회 신학교는 여섯 차례나 폭탄세레를 받았다. 그러나 정부와 우익 테러 활동이 극렬할수록 교회는 분열되기는커녕 더욱 일치되었다. 당시 로마에 있던 예수회 총장 페드로 아루페 신부는 이렇게 선언했다. “나의 사제들은 순교자로 생을 끝낼지도 모르지만 엘살바도르를 떠나지 않을 것이다. 그 이유는 그들이 민중과 함께 있기 때문이다.”
예수회 신분들이 추방된 지 한 달 후, 새로 산살바도르 대교구장이 된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그란데 신부의 친구였다. 로메로 대주교는 아길라레스에서 2백여 명의 수녀들과 2천 여 명의 농민들과 첫 미사를 봉헌하였다.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는 강론하였다.
“실종된 사람들, 자기 집을 떠나야 했던 사람들, 그리고 고문을 당하는 이들과 우리는 고통을 나누어야 합니다. 우리는 수많은 가정이 고통과 수모를 겪고 있는 것을 압니다. 그러나 형제들이여, 어떤 폭력도 주님의 책망을 받을 것입니다. 다른 사람을 죽이고 박해하고 때리는 사람은 누구나 ‘칼로 사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주님의 무서운 경고를 기억해야 합니다. 여기 아길라레스에서는 말 그대로 제 영혼을 주님께 맡긴 사제들과 선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들은 순교와 고통을 두려워하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증언은 이 나라 모든 교구의 본보기가 될 것입니다. 이곳은 십자가에 못박히신 그리스도를 향한 복음 참여를 실천할 태세를 갖춘 신도들을 가진 교회의 전진기지입니다. 바로 이런 이유로 그대들에게 말합니다. 용기를 내십시오! 우리 주님께서는 진정한ㄴ 그리스도적 해방을 향해 가는 우리의 여행에서 우리를 일깨워 주실 것입니다.”
강론이 끝났는데도 박수갈채가 전혀 없었다. 신자들 대부분은 울고 있었기 때문이다.
착한 목자는 양들의 음성을 알아듣는다
사제는 그리스도처럼 생각하고 말하고 신앙의 자녀들을 돌보며 치유하고 복음을 선포한다. 그란데 신부가 그랬고 오스카 로메로 대주교가 또한 그런 삶을 살았다. 요한복음서에서는 먼저 당신을 “양이 드나드는 문”(10,7)이라고 소개한다. “누구든지 나를 거쳐서 들어오면 안전할뿐더러 마음대로 드나들며 좋은 풀을 먹일 수 있다. 도둑은 양을 훔쳐다가 죽여서 없애려고 오지만 나는 양들이 생명을 얻고 또 얻어 풍성하게 하려고 왔다.”(요한 10,9-10)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죽음의 편에서 돌아서서 생명의 편에 서는 분이다. 억압과 굶주림을 낳는 곳에서 해방과 흥겨운 해방의 잔치를 열어놓으시는 분이다.
그분은 “착한 목자”(10,14)이기도 하다. 착한 목자는 제 양들을 알고, 그 양들도 제 목자를 안다. 백성들이 처한 상황을 이해하고 그분의 슬픔에 공감하며 그들의 필요에 응답할 줄 아는 분이다. 그러므로 그분이 하시는 말씀이 무슨 뜻인지 백성들은 속속들이 알아들을 수 있다. 하느님께서는 인간에게 말을 건네기 위해 하느님임을 버리고 인간으로 강생하기까지 하시지 않았던가. 이 세상의 고통과 번뇌, 기쁨과 희망을 아시는 분이 예수님이며, 참된 사제들은 그분처럼 산다. “양들은 목자의 음성을 알아듣는다.”(10,2)
이제 목자이신 그리스도는 “자기 양들을 하나하나 불러내어 밖으로 데리고 나간다.”(10,3) 자신 안에 꽁꽁 숨어 있던 절망과 고민을 풀어놓으라고 청하신다. 우리의 억눌리고 비뚤어진 마음을 드러내어 바로잡고, 고통은 자기만 겪는 개인적인 문제가 아니라 불의한 사회에서 만인이 겪고 있는 구조의 문제라는 것도 알려준다. 그러므로 고통받는 모든 사람들이 밖으로 나와 연대하도록 데리고 나가시는 것이다.
그러나 거짓 목자들은 양들을 한데로 이끈다. 백성들을 속이고 구슬려서 제 노에로 삼거나 죽여버린다. 다른 형제자매들과 탐욕스런 경쟁을 하도록 부추기며 서로 시기하고 질투하게 만든다. 가난을 운명처럼 받아들이고 견딜 수 없는 절망감으로 아내와 자식을 두들겨패도록 방치한다.
그들은 도둑이며 강도에 불과하다. 그들은 이 세상에서 정치지도자의 모습을 띠기도 하고 사제와 고위성직자의 모습을 띨 수도 있다. 아니면 다정한 체하는 이웃처럼 다가올 수도 있다. 그러나 제대로 정신을 차린다면 우리는 얼마든지 참된 목자와 거짓 목자를 구별할 수 있을 것이다. “양들은 낯선 사람을 결코 따라가지 않는다. 그 사람의 음성이 귀에 익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그를 피하여 달아난다.”(10,5) 그들은 이해할 수 없는 복잡한 교리를 가르치며, 사는 데 전혀 보탬이 되지 않는 이야기로 백성을 현혹시킨다. 교리를 암기시키고 죄의식을 심어주면서 자신만이 해방자라고 장담한다. 그래서 자신이 하느님으로 즉위한다.
그러나 참된 목자는 설교가 아니라, 마침내 행동으로 자신의 복음을 증거한다. 유다인들이 예수님께 물었다. “얼마나 더 우리의 마음을 졸이게 할 작정입니까? 당신이 정말 그리스도라면 그렇다고 분명히 말해주시오.”(10,24) 그들은 ‘말’을 요구했다. 그러나 예수님은 “내가 이미 말했는데도 너희는 내 말을 믿지 않는구나. 내가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행하는 일들이 바로 나를 증명해 준다.”(10,25)고 응수한다.
“아버지께서 나에게 거룩한 일을 맡겨 세상에 보내주셨다. 너희는 내가 하느님의 아들이라고 한 말 때문에 하느님을 모독한다고 하느냐? 내가 아버지의 일을 하지 않고 있다면 나를 믿지 않아도 좋다. 그러나 내가 그 일을 하고 있으니 나를 믿지 않더라도 내가 하는 일만은 믿어야 할 것이 아니냐?”(10,36-37)
그 행동이란 다름 아니라 자기 백성을 위해 기꺼이 목숨을 바치는 것이다. “착한 목자는 자기 양을 위하여 목숨을 바친다.”(10,11) 하느님께서는 “목숨을 바치기 때문에 나를 사랑”(10,17)하시며 “누가 나의 목숨을 빼앗는 것이 아니라 내가 스스로 바치는 것.”(10,18)이다. 그러므로 참된 목자는 하느님과 결합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그 백성들과도 굳게 결합되어 있는 것이다. “나는 내 양들을 알고 그들은 나를 따라온다. 나는 그들에게 영원한 생명을 준다. 그래서 그들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며 아무도 그들을 내 손에서 빼앗지 못할 것이다. 아버지께서 내게 맡겨주신 것은 무엇보다도 소중하다. 그것을 아버지의 손에서 빼앗아 갈 수 없다. 아버지와 나는 하나이다.”(10,28-30)
이런 목자 어디 없습니까? 하고 묻는다면, 그분은 이제 이렇게 답하실 것이다. “네가 가서 착한 목자가 되어라.”
마무리 기도
주님께는
목숨을 바칠 권리도
다시 얻을 권리도 있다 하십니다.
그럼 제게도 목숨을 바칠 권리,
다시 얻을 권리가 있을까요?
당신은 당신 양떼를 위해 그런다지만
그게 바로 하느님이 주신 사명이시라는데,
나는 무얼 위해 목숨을 바치고
무얼 위해 목숨을 다시 얻을까요?
당신께서 미처 챙기지 못하고
떠나신 자리에서
그 남은 사람들을 챙기기 위해
내가 목숨을 얻어 살고
그 목숨마저 그네들을 위해
지푸라기 같이
불쏘시개마냥
태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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