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용가치가 있는 노예들을 모두 성령의 이름으로 계속 잡아 보내자
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17
그대 생각
-고정희
너인가 하면 지나는 바람이어라
너인가 하면 열사흘 달빛이어라
너인가 하면 흐르는 강물소리여라
너인가 하면 흩어지는 구름이어라
너인가 하면 적막강산 안개비여라
너인가 하면 끝모를 울음이어라
너인가 하면 내가 내 살 찢는 아픔이어라
예수님께서 당신을 믿는 유다인들에게 말씀하셨다. “너희가 내 말 안에 머무르면 참으로 나의 제자가 된다. 그러면 너희가 진리를 깨닫게 될 것이다. 그리고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 그들이 예수님께 말하였다. “우리는 아브라함의 후손으로서 아무에게도 종노릇한 적이 없습니다. 그런데 어찌 ‘너희가 자유롭게 될 것이다.’ 하고 말씀하십니까?”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대답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죄를 짓는 자는 누구나 죄의 종이다. 종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르지 못하지만, 아들은 언제까지나 집에 머무른다. 그러므로 아들이 너희를 자유롭게 하면 너희는 정녕 자유롭게 될 것이다.
(요한 8,31-36)
악한 권세가 몰고 온 삼청교육대 악귀(惡鬼)
‘착검’ 그 병사들은 일제히 칼을 뽑아 총에 꽂았다. 칼날이 희게 번쩍거리며 불빛을 반사했다. 드르륵, 드르륵. 다음 순간, 어둠 속 어딘가에서 자동화기가 연사(連射) 되는 소리가 들렸다. 연병장에 새로운 정적과 공포가 한층 더 무겁게 내리 덮였다. 드르륵, 드르륵. 그것은 한번도 본 적이 없는 전설 속에만 존재하는 흉악하고 무섭고 소름 끼치는 괴물의 울음소리 같았다. 드륵, 드르륵. 그것은 어둠 그 자체가 울부짖는 소리였다. 영우는 문득 그 자리에서 총을 난사하고 총검을 휘둘러 모조리 죽여버리려는 것인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다리가 부들부들 떨렸다. 억센 손가락이 목구멍을 열어 젖히려는 듯, 꺽꺽, 울먹임이 새어 나왔다. 아버지, 어머니의 얼굴이, 미숙이의 얼굴이, 그리고 종적을 알 수 없게 된 공장 동료들의 얼굴이 눈앞에 너무나도 선명하게 떠올랐다. 눈물이 흘러내려 얼굴을 적셨다.
부대장이 입을 열었다. “삼청교육대 입소를 환영한다. 내일 견학하게 되겠지만 부대 뒷산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있다. 그 구덩이 안에 너희들의 시체가 파묻힐 것이다. 다 파묻히는 것은 아니다. 내 생각 같아서는 지금 당장 한꺼번에 너희들을 모조리 구덩이에 몰아넣고 흙을 덮어버리고 싶지만, 이 나라가 민주 국가이기 때문에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러나 명령에 불복종하는 자는 용서하지 않겠다. 그 자리에서 사살이다. 이틀 전에도 바로 지금 너희가 서 있는 그 자리에서 여섯 사람이나 살해당했다. 길은 둘뿐이다. 개과천선하거나 사살당하거나. 왜냐하면 개과천선하지 않는 자는 이곳에서 나갈 수 없기 때문이다. 기한은 4주다. 4주 사이에 개과천선하지 않는 자는 손발을 묶어 구덩이에 던져버릴 것이다. 이상.”
부대차렷! 열중쉬엇! 차렷! 부대장님께 대하여 받들어 총! 이어 또다시 어둠 그 자체가 입을 열어 외치는 듯한 소리, 충성! 부대장이 사열대에서 내려가싸. 그와 동시에 병사들은 곤봉으로 눈앞에 있는 민간인들의 등줄기를 후려쳤다. 앉아! 일어서! 앉아! 일어서! 민간인들이 명령에 따라 앉고 일어서는데도 곤봉과 군화발을 계속해서 그들을 난타했다. 동작 봐라, 이 새끼들. 앞으로 취침, 뒤로 취침, 대가리 박아, 원위치, 대가리 박아, 원위치. 이 새끼들이 총맞아 죽고 싶어 이러나, 칼 맞아 죽고 싶어 이러나. 서, 박아. 서, 박아. 병사 한 사람이 몸을 훌쩍 날려 영우에게 두발차기를 했다. 영우는 끽 소리와 함께 쓰러졌다. 병사는 그를 지근지근 밟아댔다.…
새하얀 헤드라이트 불빛 속에서 그들은 때리고 맞고 피를 흘리고 나동그라지며, 개머리판을 흔들고 곤봉을 휘두르며 참으로 이상한 군무(群舞)를 추고 있었고, 검은 하늘은 높다랗게 물러서서 그것을 내려다보고 있었으며, 그 너머 어둠 속에서는 모습을 갖춘 짐승들이 드르륵, 드르륵 울부짖고 있었다(최인석, 「노래에 관하여」, 1995년 이상문학상 수상작품집, 350-351쪽 참조).
1980년 광주 시민들을 폭도로 몰아 공수부대원들의 먹이로 던져주었던 전두환 정권은 이 폭력을 전사회적으로 관철시키기 위해 삼청교육대를 만들었다. 그 당시 술 먹고 파출소 소장에게 대들었던 사람, 지방 유지에게 밉보였던 사람들은 모두 이 지경에 처해졌다. 무서운 일이다. 죄악이다.
콜럼버스와 그리스도교라는 악귀(惡鬼)
5백여 년 전, 황갈색 피부의 벌거벗은 아라워크족들은 호기심에 가득차서 이상하고 커다란 배 산타마리아호를 구경하기 위해 해안으로 몰려나왔다. 신대륙을 발견했다는 콜럼버스였다. 아라워크 원주민들은 긴 항해로 지친 그들에게 먹을 것과 물, 선물을 가져다 주었다. 이 은덕을 콜럼버스는 나중에 몇백 배 몇천 배 원수로 갚았다.
스페인 국왕은 콜럼버스가 황금과 향료를 가져다 주면 그 이익의 10퍼센트를 되돌려 주기로 약속했으며, 새로 발견한 땅의 총독지위, 그리고 해양의 제독(Admiral of the Ocean Sea)이라는 명예를 주기로 했다. 이에 콜럼버스는 아이티에 기지를 건설하고 먼저 노예 약탈을 감행했다. 1천5백 명의 아라워크족 남자, 여자, 아이들을 몰아 스페인 사람들과 개들이 지키고 있는 우리에 집어넣고 그 중에서 5백 명의 우수한 표본을 골라 배에 실었다. 이들 5백 명 가운데 2백 명은 항해 중에 죽었고, 나머지는 스페인에 도착하여 마을의 가톨릭교회 부주교(副主敎)에 의해 경매에 붙여졌다.
그 부주교는 “노예들은 태어날 때처럼 벌거벗었으나 동물처럼 부끄러움을 나타내지 않았다.”고 보고했다. 콜럼버스는 이를 두고 이렇게 말했다. “사용가치가 있는 노예들을 모두 성령의 이름으로 계속 잡아 보내자.” 그러나 너무나 많은 노예들이 도중에 죽어갔다. 그리고 본국에서 자신에게 투자했던 사람들에게 배당금을 돌려주기 위해 필사적으로 노력했던 콜럼버스는 배를 황금으로 가득 채우겠다던 약속을 지켜야 했다.
아이티는 거대한 황금 벌판이 있다고 믿었던 인도가 아니었다. 그런데도 콜럼버스는 아이티 시카오(Cicao)에 살던 14세 이상의 모든 원주민들에게 3개월에 한 번씩 일정한 양의 황금을 가져오도록 명령했다. 황금을 가져오는 인디언들의 목에는 구리증표를 걸어주었다. 구리증표를 걸지 못한 사람들은 손이 잘려진 채 피를 흘리며 죽어갔다. 이는 처음부터 엉뚱한 지시였다. 주위에 황금이라곤 개울에 쌓여 있는 사금가루뿐이었던 것이다. 공포에 질린 원주민들은 도망가다가 소총, 칼과 말을 가진 약탈자들에게 대항했으나 대부분 교수형에 처해지거나 불에 타 죽었다. 아라워크족 중에서 일부는 카사버 독을 먹고 집단 자살하기 시작했고, 약탈자들에게 어린애들을 넘겨주지 않으려고 살해하였다. 25만 명의 아이티 원주민 가운데 2년 동안 살육, 수족 절단, 자살로 인해 절반이 죽었다.
황금이 하나도 없는 것이 분명해지자 인디언들은 대농장의 노예 노동자로 끌려갔다. 그들은 잔혹하게 혹사당했으며 수천 명씩 죽어갔다. 1515년까지 남은 인디언은 5만명 정도였다. 1550년에 이르면 5백 명밖에 남지 않는다. 젊은 선교사로 그 당시 쿠바 정복에 참가했던 라스 카사스(Bartolome de las Casas) 신부는 한때 인디언 노예들이 일하는 대농장을 소유하기도 했지만, 얼마 후 이를 포기하고 스페인의 잔학성을 폭로하는 격렬한 비평가가 되었다.
“원주민들은 온화하고 평화스러운 기질을 가졌다.… 그러나 우리가 분노하는 것은 원주민들을 파괴하고, 죽이고, 난도질하고 파멸시키는 행위이다.… 대장과 그 추종자들은 미치광이가 되었고 또 국왕을 만족시키기에 혈안이 되어 인디언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죄악을 자행했다.”
라스 카사스 신부는 <서인도 제도의 역사>에서 스페인 정복자들의 작폐(作弊)를 잘 보여주고 있다. 그들은 ‘급할 때는 인디언의 등을 타고 갔으며’ 또는 인디언들이 릴레이식으로 운반하는 ‘해먹(hammock)’을 타고 갔다. “이때 인디언들로 하여금 넓은 나뭇잎을 들고 따라오면서 햇빛을 가리게 했고, 거위 날개로 부채질을 하게 했다.”
인디언에 대한 완전한 지배는 가혹함으로 귀결되었다. 스페인 사람들은 “자신의 칼날이 예리한가 시험해 보기 위해 10명씩 20명씩 인디언들을 베어 죽이거나 살점을 자르는 것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라스 카사스는 “어떻게 그리스도교 신자라는 사람들이 앵무새를 들고 가는 인디언 소년을 만나자 앵무새를 빼앗고 장난삼아 그 소년의 목을 자를 수 있었는지” 탄식한다.(하워드 진, 「미국민중저항사 상권」, 일월서각, 7-13쪽 참조). 5백 여년 전 스페인 군대와 함께 들어온 그리스도교가 아메리카 원주민들에게 전해준 것은 복음이 아니라 죽음이었던 것이다. 기쁨이 아니라 슬픔을 가져왔고, 축복의 땅을 저주의 땅으로 바꾸어 놓았다.
너희는 처음부터 악마의 자식들이다
“너희는 악마의 자식들이다. 그래서 너희는 그 아비의 욕망대로 하려고 한다. 그는 처음부터 살인자였고 진리 쪽에 서본 적이 없다. 그에게는 진리가 없기 때문이다.”(요한 8,44)
오늘 읽은 성서에서 우리는 악마의 자식과 진리 편에 선 이들에 대한 말씀을 듣는다. 예수님은 스스로 “빛이요 진리요 생명”이라고 말씀하셨다. 달리 풀어 쓴다면 “생명을 주는 빛만이 진리”라고 말할 수 있다. 그리스도교 신자들은 세상에 속해 있지만 세상의 질서에 얽매이지 않는다. 하느님에게서 오는 빛을 따라 살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렇게 말씀하신다. “너희는 아래에서 왔지만, 나는 위에서 왔다. 너희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만 나는 이 세상에 속해 있지 않다.”(8,23) 세상이 온통 권력과 재물을 탐하여 인간 생명을 무자비하게 솎아낼 때 거기엔 세상의 질서가 있을 뿐 천상의 빛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이런 자리에서 “아니다, 아니다!”라고 말하는 분이 예수님이시다. 그리고 그리스도교 신자라면 당연히 함께 “아니다. 아니다!”라고 말해야 한다.
그러면 도대체 예수님은 어떤 분이시던가. 유다인들이 물었다. “그러면 당신은 누구요?”(8,25) 그러자 예수님은 “처음부터 내가 누구라는 것을 말하지 않았느냐?”(8,25)라고 답변하신다. 그리고 “너희가 사람의 아들을 높이 들어 올린 뒤에야 내가 누구라는 것을 알게 될 것”(8,28)이라고 한다. 높이 들어 올려진다는 것은 곧 십자가 죽음을 뜻하는 것인데 십자가는 노예들에게 가해진 형벌이다. 스파르타쿠스와 반란 노예들이 예수님처럼 그렇게 십자가에 매달려 죽었다. 노예 해방을 바라던 이들에 대한 로마 제국의 응답이 십자가였던 것이다.
이스라엘의 선조들은 이집트에서 종살이하던 노예였으며, 그들을 구하신 분이 곧 야훼 하느님이셧다. 그분은 식민지 나라에서 노예처럼 사는 백성을 구원하시려고 스스로 노예로 태어나시기까지 했다. 예수님은 거의 평생 동안 목수의 작업대에서 떠나지 못했다. 그리고 자신과 같이 노예의 처지에 놓인 백성들을 위해 분연히 떨쳐 나섰지만 그 대가는 십자가 형벌밖에 없었다. 그러나 그 죽음이 이 세상과 인간의 화해시키고, 억울한 백성들의 구원을 보증하는 부활로 나타났다. 노예의 현실 한가운데서 노예의 구원을 노래하는 것이 그분의 사명이었다.
만인의 해방을 위해 고난을 감당할 용의가 있는 자는 만사에 자유롭다. 먹구름 사이로 햇살이 스미듯 두려움은 사라지고, 내일 할 일만 남겨질 뿐이다. 그러므로 노예들만이 예수님의 하느님 됨을, 하느님이 해방 역사의 주인이심을 안다. “너희가 내 말을 마음에 새기고 산다면 너희는 참으로 나의 제지이다. 그러면 너희는 진리를 알게 될 것이며 진리가 너희를 자유롭게 할 것이다.”(8,31-32) 그들이 누리는 자유는 고난에도 불구하고 진리가 주는 자유이다. 그 진리는 예수 그리스도 자신이다.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듣고 “우리는… 아무한테도 종살이 한 적이 없는데 선생님은 우리더러 자유를 얻을 것이라고 하시니 어떻게 된 일입니까?”(8,33) 하고 따졌다. 너무나 당연한 반응이다. 이들은 명령하는 자의 위치에서 명령받아야 하는 사람들의 위치로 내려와 본 적이 없다. 노예를 부리는 자의 신분에서 노예의 신분으로 추락해 본 경험이 없었다. 언제나 위풍당당하고 오만하며 배불리 먹었으며 탐욕스러웠던 것이다. 이들에게 예수님은 “죄를 짓는 사람은 누구나 죄의 노예”(8,34)라고 선언하신다.
너희가 배부른 만큼, 너희가 위풍당당한 만큼 너희가 굶주리게 만든 이들이 너희를 고소하고 있으며, 너희에게 고통받는 이들이 너희를 탄핵하고 있다고 선언하신다. “노예는 자기가 있는 집에서 끝내 살 수 없지만 아들은 영원히 그 집에서 살 수 있다.”(8,35) 언젠가 하느님은 이 죄업(罪業)을 다 갚아주실 것이다. 너희가 누리던 금은보화와 화려한 궁전과 번지르르한 율법서와 사냥개 같은 채찍을 꺾어버릴 것이다. 너희를 안온하게 감싸주던 모든 집에서 쫓겨날 것이다.
이처럼 선언하는 자신을 죽이려고 음모를 꾸밀 것까지도 예수님은 알아챈다. “너희는 하느님에게서 들은 진리를 전하는 나를 죽이려고 한다.”(8,40) 그들은 당황하여 “당신은 사마리아 사람이며 마귀 들린 사람이오. 우리 말이 틀렸소?”(8,48) 하고 항의하지만 “나는 마귀들린 것이 아니라 내 아버지를 높이고 있다. 그런데도 너희는 나를 헐뜯고 있다. 나는 나 자신의 영광을 찾지 않는다. 내 영광을 위해서 애쓰시고 나를 올바로 판단해 주시는 분이 따로 계시다.”(8,49-50)라고 응수한다. 가난하고 억울한 영혼들에게 이 얼마나 든든한 바람막이인가? 얼마나 든든한 성채이며, 영혼의 집인가? “정말 잘 들어두어라. 내 말을 잘 지키는 사람은 영원히 죽지 않을 것이다.”(8,51)
마무리 기도
우리에게 참된 자유를 주시려고
진리로 오셨다는 주님,
정말입니까, 당신이 진리라는 게.
당신께서 내 멍에를 풀어주고
내 설움을 안아주고
내 하소연을 들어줄 그분이라는 사실이
정말인가요, 하느님.
언제나 위풍당당하고 그만큼 오만하며
언제나 배물리고 먹고 그만큼 탐욕스러운
죄의 노예들을 까불리고
연약한 우릴
불러 세우는 분이 당신 정말 맞으신가요.
스스로 자유로우신 분,
그래서 우리에게 자유를 선사하시는 뿐,
그분 당신이 맞나요.
그럼 얼마나 좋을까요, 하느님.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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