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 안에서, 황제가 그리스도를 정복하다

한상봉의 요한복음 묵상 [지상에 몸푼 말씀]-9

2021-05-04     한상봉 편집장

 

받들어 꽃

-곽재구

국군의 날 행사가 끝나고
아이들이 아파트 입구에 모여
전쟁놀이를 한다
장난감 비행기 전차 항공모함
아이들은 저희들 나이보다 많은 수의
장난감 무기들을 횡대로 늘어놓고
에잇 기관총 받아라 수류탄 받아라
무서운 줄 모르고
서로가 침략자가 되어 전쟁놀이를 한다
한참 그렇게 바라보고 서 있으니
아뿔사 힘이 센 304호실 아이가
303호실 아이의 탱크를 짓누르고
짓눌린 303호실 아이가 기관총을 들고
부동자세로 받들어 총을 한다
아이들 전쟁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우리가 알지 못했듯이
아버지의 슬픔의 클라이막스가
받들어 총에 있음을 아이들은 알지 못한다
떠들면서 따라오는 아이들에게
아이스크림과 학용품 한아름을 골라주며
아무것도 모르는 아이들 앞에서
나는 얘기했다
아름답고 힘있는 것은 총이 아니란다
아름답고 소중한 것은 우리들이
살고 있는 이 세상과 별과
나무와 바람과 새 그리고
우리들 사이에서 늘 피어나는
한 송이 꽃과 같은 것이란다
아파트 화단에 피어난 과꽃
한 송이를 꺾어들며 나는 조용히 얘기했다
그리고는 그 꽃을 향하여
낮고 튼튼한 목소리로
받들어 꽃
하고 경례를 했다
받들어 꽃 받들어 꽃 받들어 꽃
시키지도 않은 아이들의 경례소리가
과꽃이 지는 아파트 단지를 쩌렁쩌렁 흔들었다

예수님께서 그들에게 말씀하셨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아버지께서 하시는 것을 보지 않고서 아들이 스스로 할 수 있는 것은 하나도 없다. 그분께서 하시는 것을 아들도 그대로 할 따름이다. 아버지께서는 아들을 사랑하시어 당신께서 하시는 모든 것을 아들에게 보여 주신다. 그리고 앞으로 그보다 더 큰 일들을 아들에게 보여 주시어, 너희를 놀라게 하실 것이다.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일으켜 다시 살리시는 것처럼, 아들도 자기가 원하는 이들을 다시 살린다.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심판하지 않으시고, 심판하는 일을 모두 아들에게 넘기셨다. ... 내 말을 듣고 나를 보내신 분을 믿는 이는 영생을 얻고 심판을 받지 않는다. 그는 이미 죽음에서 생명으로 건너갔다. 내가 진실로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죽은 이들이 하느님 아들의 목소리를 듣고 또 그렇게 들은 이들이 살아날 때가 온다. 지금이 바로 그때다. (요한 5,19-25)

선한

만인을 위한 자유

“수단이 썩 잘 어울리는군요, 보프 신부. 그 옷이 당신이 누구인지를 세상 사람들에게 증거해 주죠.” 라칭거가 말했다.
“하지만 브라질에서는 더위 때문에 이 옷을 입기가 쉽지 않습니다.” 보프가 응수했다.
“그렇지만 그것 때문에 사람들은 헌신과 인내를 알아보지요. 그들은 그가 이 세상의 죄를 대신 짊어지고 있구나 하고 말할 겁니다.”
“물론 우리에게는 정신주의의 증거가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들은 수단이 아니라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잘 차려 입어야 하는 것은 바로 그 마음입니다.”
“하지만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아요. 어떤 것들은 눈에 보여야 합니다. 안 그렇습니까?”
“그렇습니다. 하지만 수단은 권력의 상징일 수도 있습니다. 제가 이 옷을 입고 버스를 타면 사람들은 자리에서 일어나 저에게 자리를 양보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그 사람들의 종이어야만 합니다.” (페니 러녹스, <로마 교황청과 국제정치>, 한국신학연구소, 163쪽 참조)

<교회 : 카리스마와 권력>이라는 책이 빌미가 되어 로마로 소환당한 레오나르도 보프 신부가 1984년 바티칸 신앙교리성 장관인 라칭거 추기경과 나눈 심문의 일부이다. 보프 신부는 권력이 있고 부유한 카이사르의 교회 안에서 사랑이 넘치고 가난하지만 영적으로 부유한 교회를 꿈꾸었기에 ‘혹세무민(惑世誣民)’ 의 죄로 로마 교회의 징계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이제는 결코 사제가 된 적이 없었던 아시시의 프란치스코처럼 수단을 완전히 벗어버린 채 모든 사회적 · 종교적 특권을 마다한 채 평신도의 자리로 돌아와 하느님 나라를 열망하며 헌신하고 있다. 이는 아마도 ‘만인의 자유를 희망하는 자는 스스로 자유로워야 한다.’는 것을 입증한다고 말할 수 있다.

세상에 속해 있으면서도 세상의 자본주의적 탐욕과 경쟁가치로부터 초연해 있으며, 교회 안에 속하면서도 그 도그마를 상대화시킬 능력이 있으며, 겸손하면서도 불의한 권력에 맞서 싸울 줄 아는 의연함을 지닌 아름다운 영혼이 아니고서야 어찌 우리의 머리카락 한 가닥 한 가닥마저 헤아리시는 하느님의 사랑을 증거할 수 있겠는가.

아버지를 따라 그대로 할 뿐

오늘 우리는 요한복음서를 통하여 ‘하느님의 아들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권한’에 대한 이야기를 듣게 된다. 예수는 안식일법을 어겨가면서까지 병자를 치유해 주셨다는 이유로 바리사이파 사람들의 문초를 받았다 (요한 5,11-16 참조). 그러자 예수는 “내 아버지께서 언제나 일하고 계시니 나도 일하는 것이다.” (5,17) 라고 답변한다. 나아가 “아들은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이지 무슨 일이나 마음대로 할 수 없다.” (5,19) 고 덧붙인다.

아버지께서 아들을 너무나 사랑하시기 때문에 당신이 하시는 일을 친히 보여주시고, 이제 아들을 파견하여 더 큰 일도 보여주리라 장담한다. 여기서 아버지와 아들은 실과 바늘처럼 함께한다는 사실을 우리는 알 수 있다. 아들이 하는 일은 아버지의 일과 일치되어 있다. 인격적인 사랑으로 묶인 아버지와 아들이다. 이렇게 요한복음서에서는 열여덟 번이나 예수님을 ‘아들’이라고 부른다. 그 중에서 여덟 번이 5,19-26에 나온다. 이는 하느님께서 인격적인 존재로 우리와 대화를 나누고, 아들과 관계 맺는 분이라는 것을 웅변적으로 보여준 것이라 할 것이다.

이 ‘사람의 아들’은 “아버지께서 죽은 이들을 다시 살리시듯이” (5,21) 원하는 사람을 살리실 것이며, 아버지께서는 아무도 친히 심판하지 않으시고 아들에게 심판관의 권한을 주셨다 (5,22). 그러므로 아들의 말을 듣고 그 아버지를 믿는 사람은 생명을 얻을 것이요, 죽음의 세계에서 벗어나 생명의 세계로 들어선다 (5,24). 아버지께서 생명의 근원이신 것처럼 아들도 생명의 근원이 되셨기 때문이다. 이는 순전히 아들이 하느님에게서 파견받는 자라는 데서 비롯되는 것이다.

생명과 죽음의 기로에서 우리가 하느님의 음성을 들을 터인데, 그때가 ‘바로 지금’ (5,25) 이라는 것이다. 곧 예수의 음성을 듣는 것이 곧 하느님의 음성을 듣는 것과 같다는 뜻이다. 이렇게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느님과 관계를 맺는다. 그리고 그 예수님은 우리가 “보잘것없는 이들에게 해준 것이 곧 나에게 해준 것이다.” 라는 말씀을 통하여 자신을 가난한 이들과 동일시하신다. 그러므로 우리가 예수를 그리스도라고, 주님이라고 고백한다면 당연히 가난한 이들의 음성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 그들 입에서 “나는 너를 모른다.”는 이야기를 듣게 된다면 우리는 구원의 길이 막혀버리는 것이다. 그분은 가난한 이들과 일치하시기 때문이다.

 

황제

황제 그리스도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오직 ‘성서의 그리스도만을 통하여’ 하느님께 다가가는 길을 선택하였다. 이 길만이 생명의 세계에서 빗나가지 않고 그리스도 중심의 교회를 건설할 수 있도록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는 본성상 하느님이셨지만 자신을 비우고 종의 본성을 받아들이셨으며, ‘부자였지만’ 우리를 위해 ‘가난한 자’가 되셨다. 그러므로 교회가 소명을 완수하기 위해서는 그 도구로서 인간을 필요로 하기는 하지만 교회는 지상의 영광을 추구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 아니라 모범을 보여서라도 겸손과 자기 희생을 선포하기 위해 세워진 것이다.” (교회헌장)

그러나 이전까지 교회는 생명의 주님이신 그리스도의 자리에 교회 자신, 또는 성직자들의 권위를 내세웠다. 그래서 많은 교회 지도자들이 여전히 예수님이 “이들은 나를 입술로는 공경하나 마음은 내게서 멀리 떠나 있다.”고 질책했던 바리사이파 사람들처럼 행동하였다.

이는 우리 교회 지도자들이 초대교회가 간직했던 갈릴래아의 예수를 잃어버리고 황제의 모범을 따랐기 때문에 발생한 불행한 사건이다. 초대교회는 살아 남기 위해 어떤 구조(제도) 가 필요했던 게 사실이지만 313년 콘스탄틴 황제가 그리스도교를 공인한 이후 로마인들의 법적인 위계질서를 채택함으로써 근본적인 잘못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이 구조로 인하여 혜택을 본 것은 작은 공동체들의 연합이었던 초대교회에는 없던 성직계급이었다. 가난하고 박해받던 교회가 로마 제국의 교회가 되면서 그리스도교 지도자들에게 돈과 권력이 제공되었다. 그래서 일부 성직자들은 엄청난 부자가 되었고, 부유한 교구의 주교직을 차지하려고 폭력사태가 발생하는 경우도 흔히 있었다.

이를 두고 화이트헤드라는 학자는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서구세계가 카이사르(황제)가 정복한 그리스도교를 받아들였을 때, 그리고 카이사르의 법률학자들이 편집한 서구 신학을 규범으로 받아들였을 때, 겸손을 소중히 했던 소박한 갈릴래아의 신앙관은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사그라들었다. 반면에 이집트와 페르시아, 로마제국의 지배자들의 모습에 따라 만들어진 하느님에 대한 뿌리 깊은 맹목적 숭배는 계속 유지되었다. 교회는 오로지 카이사르(황제)에게만 속하는 모습을 하느님께 갖다 붙였다.”

갈릴래아 흙먼지 날리는 거리에서 맨발의 청춘으로 사셨던 예수님이 이제 홍포를 걸친 황제로 변신하여 백성들에게 선보였던 것이다.

갈릴래아 사람의 신앙으로

초대 그리스도교 카타콤바 미술에서는 예수 그리스도를 턱수염이 없고 친절한 모습을 한 젊은 양치기로, 즉 사람들에게 사랑을 불러일으키고 신뢰를 받는 지도자로 그렸다. 그러나 4세기에 교회가 로마제국의 국교가 되면서 예수의 초상은 턱수염을 기르고 준엄한 표정을 짓고 있는, 경외심을 불러일으키고 복종을 요구하는 엄격한 황제의 이미지로 변화되었다. 겸손의 상징이 권력의 상징으로 변질된 것이다.

복음서에서 찾아볼 수 있는 그리스도는 세속적 권력과 부를 거부한 가난한 민중의 한 사람이었지만 여러 시대를 거치면서 그의 모습은 더욱 왜곡되어 갔다. 당시 콘스탄틴 황제의 궁정주교였던 카이사리아의 에우세비오스는 ‘하나의 하느님, 하나의 로고스, 하나의 황제, 하나의 제국’이 있을 뿐이라고 기록했다. 하느님도 예수도 황제도 제국도 하나라는 것이다. 이는 곧 하느님의 의지가 황제를 통해 실현된다는 것을 뜻하며, 황제를 반대하는 것은 곧 하느님을 반대하는 불경죄로 취급되었음을 말한다. 그러니 과연 누가 황제와 그의 군대에 저항할 수 있겠는가.

이 마당에 그리스도교의 최고 지도자는 ‘교회의 황제’ 라고 풀이될 위험이 있는 ‘교황(敎皇)’ 이라 불려졌다. 교황의 옷은 궁정대관식 때 차려 입는 장엄한 복장으로 바뀌었고, 삼중관(三重冠) 과 금빛 지팡이는 그 막강한 권위를 상징하였다. 헐벗고 굶주린 이들과 자신을 동일시했던 갈릴래아의 예수를 우리는 어디서 발견할 수 있을까. 하느님은 이제 부자들의 편에 서 계신 것처럼 보였기에 교회는 그후 아시시 프란치스코의 복음선포를 기다려야 했다.

다시 말하건대, 그래서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아버지께서 하시는 일을 보고 그대로 할 뿐” (5,19) 이라던 예수님의 길을 따랐던 초대 교회 공동체의 모범을 다시 배워야 한다고 역설했던 것이다. 이런 모습을 우리는 이교도였던 그리스의 철학자 아리스티데스가 하드리안 로마 황제에게 보고했던 문서를 통해 읽어낼 수 있다.

“그들은 서로 사랑합니다. 그들은 언제나 과부를 돕습니다. 그들은 고아를 괴롭히려는 사람들에게서 고아를 구합니다. 그들은 무언가 가진 것이 있으면 아무것도 가진 것이 없는 사람에게 아낌없이 줍니다. 그들은 이방인을 보면 집으로 데려갑니다. 그리고 그가 마치 친형제나 되는 것처럼 기뻐합니다. 그들이 생각하는 형제란 일상적인 의미의 형제가 아니라 성령을 통해 하느님 안에 있는 형제를 뜻합니다.”

이렇게 2세기 초 로마 교회는 사랑에 이끌려 도시빈민 2만여 명에게 먹을 것을 나누어 주었던 것이다. 그것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른 길이었다.

 

[마무리기도-한상봉]

하늘의 손길을 닮은 예수님,
당신은 하느님의 아들이며
하늘과 땅 위의 모든 권한을
하느님에게서 받았다는데
당신은 갈릴래아의 
착박한 땅 위에 머무시고
겸손하게 십자가를 받아 들이시고
가난한 이들의 마음 속에
묻히셨습니다.
그들 안에 뿌리내려
꽃으로 부활하셨습니다.
그런데 우리 교회는
흙속에 발디딜 틈새 하나 없이
콘크리트 포장된 마음밭과
콘크리트 성당 안에서
빛나는 구두코를 비추어보며
갈릴래아를 떠나 보내기에 마음 씁니다.
카타콤바의 순교자들은
제대 밑에 파묻고
높은 계단처럼 높은 첨탑처럼
황제처럼 또한 그 시종처럼 분주합니다.
이제라도 우리가 
프란치스코의 가난과
겸손을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요.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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