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효상, 대구교구의 얼굴 마담이 박정희와 야합하다
한국교회의 이데올로기적 선택과 대구교구의 보수성-2
한국천주교회의 전통적 입장은 반공주의와 민주주의의 균형이었다
해방 이후 정치적 맥락에서 볼 때, 한국천주교회는 ‘반공주의’과 ‘민주주의’라는 이데올로기를 둘러싸고 혼전을 거듭하면서 성장해 왔다. 한국교회에서 반공(反共)은 언제나 상수(常數)의 자리를 놓치지 않았다. 좌우대립과 분단상황은 이를 더욱 고착화시켜왔다. 그러나 민주주의에 대한 신념은 정치적 이해관계에 따라서 다소 변수(變數)의 자리에 머물러 있었다.
한국교회가 반공이데올로기를 주장한 것은 일제강점기를 거슬러 올라가서 상수로 있었는데, 교황청은 일본제국주의와 뭇솔리니의 파시즘과 히틀러의 나치즘과 더불어 방공(防共)협약을 맺은 바 있으며, 이는 해방 이후 한국 가톨릭교회가 민족주의 세력보다는 반공을 주장하던 미군정과 이승만 정권에 그렇게 쉽게 연대할 수 있었던 이유를 설명해 준다. 이는 또한 한국천주교회가 장면의 민주당 정권과 4.19혁명의 결과를 무산시키고 집권한 박정희 군사정권에 그렇게 쉽게 동조했던 까닭도 설명해 준다. 가톨릭교회는 전통적으로 민주주의 보다 반공주의를 앞세워 왔다. 그리고 대구교구는 해방이후 지금까지 반공만을 상수로 선택한 유일한 그룹으로 남아 있다는 데 대구교구의 비극이 있다.
해방공간에서 대구교구에서 운영하던 <가톨릭시보>1949년 11월 10일자 사고(社告)에서는 “우리 대한민국은 극동의 민주보루로서 우리 가톨릭은 천주를 거스르고 신을 부인하는 저 악마의 소산 공산주의에 대한 투쟁을 개시한지 이미 오래 전이다. 이렇게 우리는 벌써 다만 국민의 의무로서만이 아니라 또한 가톨릭의 전우로서 대한민국이 가장 필요로 하는 비행기의 헌납운동에 더욱 힘쓰자... 물론 우리는 국민으로서 또는 직장의 일원으로 그 외 또 여러 부분으로 이 국민운동에 벌써 많은 부담이 있는 줄 안다. 그러나 우리는 반공의 최후전사로 자인하는 가톨릭이다. 우리의 정신을 다시한번 표시하자. 우리는 가톨릭 신자이기에 누구보다 더 나라를 사랑한다는 것을.”이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한국천주교회의 전통적 맥락은 굴곡이 없던 것은 아니지만 기본적으로 반공과 민주주의 가치의 균형에 비중을 두고 있었다. 이는 장면과 이승만의 결별에서 극적으로 볼 수 있다. 이승만은 한국전쟁을 정권 안정화의 발판으로 삼고자 1952년에 형식적 민주주의 원칙마저 저버리고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킴으로써 미국식 민주주의 훈련을 받은 장면과 갈등을 일으켰다. 당시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교회는 장면과 자신의 운명을 동일시하고 있었으므로 당연히 이승만에 대해 비판적 입장으로 돌아선다.
특히 이승만과 교회의 갈등은 1956년 정부통령 선거와 1958년 민의원 선거전에서 두드러져, 이승만을 지지하는 개신교측과 장면을 지지하는 천주교측은 마치 신구교의 대리전을 치르듯 선거에 몰입했다. 급기야 이승만정권은 가톨릭교회에서 운영하던 <경향신문>을 1959년 군정법령 제88조 위반으로 폐간시키기에 이르렀는데, 결국 여론에 밀려 무기정간으로 바뀐 뒤에 4.19혁명 이후에야 복간된다. 폐간 직전 경향신문은 20만 1천9백여 부를 발행하는 영향력있는 신문 중 하나였다.
한편 대구교구에서 발행하던 <대구매일신문>도 1955년에 필화사건에 휘말려 백주대낮에 최석채 주필이 테러를 당하고 신문사가 자유당이 주모한 청년단에 의해 피습당했다. 당시 문제가 된 것은 최석채 주필의 ‘학도를 도구로 이용하지 말라’는 사설이었지만, 그 전에도 최 주필은 ‘한국의 정당정치’라는 논설에서 “야당진출의 길을 틔워 독재화의 길을 막자”고 주장했다. 이 신문은 그 뒤로 더 유명해져 1960년 7월 7일부터는 제호를 <매일신문>으로 바꾸어 지역성을 탈피한 전국지를 지향했기에 그 영향력은 더 커졌다. 대구교구 역시 서정길 대주교와 이효상이 박정희정권과 밀월관계를 설정하기 전까지는 반공과 민주주의의 균형이라는 한국천주교회의 일반적 흐름 속에 놓여 있었던 것이다.
군사정권의 등장 이후 대구교구의 이탈-“반공만이 상수, 민주주의는 변수다”
장면을 수반으로 하는 민주당 정권이 5.16군사쿠데타로 좌절된 뒤에 교회는 혼란을 재빨리 수습하고 군사정권의 입장을 지지해 주었다. 5.16군사쿠데타는 헌정질서를 유린하고 민주주의를 유린한 폭거였지만, 군사정권이 6개항의 혁명공약을 천명하고, 특히 “반공을 국시의 제일의로 삼고, 지금까지 형식적이고 구호에만 그친 반공태세를 재정비 강화한다”는 명분을 내세움으로써 교회는 이에 동조하면서 해방공간에서 보여주었던 강력한 정치세력화에서 한발 물러섰다. 장면내각은 국무회의를 열어 내각 총사퇴를 의결하였으며, 윤보선 대통령은 계엄령을 추인했다.
강력한 반공주의와 흔들리는 민주주의 사이에서 갈등하던 한국교회가 명백히 반공주의에 대한 선택을 강요받은 셈이다. <가톨릭시보>는 ‘군사혁명과 반공정책: 반공은 국토통일보다 중요하다’라는 기사를 통해 “우리가 통일을 원하는 것은 국민 모두가 잘살기 위해서인데 공산치하에서는 잘살 수 없으므로 군사혁명정부가 국시를 반공으로 삼은 것은 현명한 정책이다... 또 이 땅이 공산화되더라도 통일이 되어야 한다든가 공산당의 음모를 알면서도 민주주의에 충실하기 위하여 언론집회의 자유를 주어야 한다는 것은 본말이 전도된 것”이라고 발표했다.(가톨릭시보, 1961년 5월 28일자 참조) 그리고 군사정권의 시책에 적극 협력하는 모습의 하나로 ‘재건국민운동 천주교 서울교구추진회’까지 결성된다.
공교롭게도 군사쿠데타를 주도한 박정희가 쿠데타 이후 1961년 6월 3일 언론사 가운데 가장 먼저 단독인터뷰를 한 곳이 <(대구)매일신문>이었다. 당시 <매일신문> 서울분실에 주재하는 정경원 기자와 인터뷰를 하면서 박정희는 자신이 대구 출신(정확히 경북 선산)이므로 고향에 대한 배려 차원에서 대구의 유력한 신문과 인터뷰한다고 밝혔다. 이 자리에서 박정희는 5.16쿠데타의 직접적 동기를 “장면정권이 국민의 뜨거운 염원을 팽개치고 무능과 부패로 일관해서 도저히 그들로서는 긴박한 위기를 타개할 힘이 없다고 단정했기 때문”이라고 했다. “이러다간 1년 후에는 공산주의가 시골 농촌까지 침투할 것이라고 나는 분명히 판단했다”는 것이다.
한편 1962년 3월 10일 한국교회가 교황청 대리감목구에서 정식 교구로 승인되면서, 대구교구의 서정길 주교는 3월 25일자로 대주교에 승품되었는데, 서정길 대주교는 <천주교회보> 편집장도 역임하고 <가톨릭청년>에 왕성한 기고활동을 벌였던 이효상에게 막바로 창당된 민주공화당에 들어갈 것을 권했다. 이는 당시 한국교회의 일반적 정서와는 다른 길이었다. 장면정권의 퇴각 이후 한국천주교회는 정치적 태도를 정할 수 없었으며, 이후 한국교회의 지도부는 대체로 장면을 통해 정계에 입문한 김대중과 운명을 함께 하였기 때문이다. 이는 1970년대 이후 대구교구가 한국천주교 주교단의 입장과 상관없이 한사코 군사정권의 편에만 서서 발언하게 된 배경이 된다. 대구는 보편교회의 입장을 떠나 ‘대구’라는 ‘지역교회’의 정치적 영향력에 몰입했다.
이효상은 줄곧 교직에 머물다 1960년에 무소속으로 참의원 의원으로 당선되면서 정계에 입문했다. 그러나 8개월 만에 군사쿠데타로 정계에서 물러나게 되지만, 1962년에 민주공화당에 입당한 뒤로 박정희 정권과 한국천주교회, 특히 대구교구와 군사정권이 밀월관계를 유지하는데 결정적 역할을 하게 된다. 과거에 교회가 일치단결해서 장면을 정계에 내보내고 그를 통해 교회의 지위상승을 꾀했듯이 대구교구는 이제 이효상을 그런 식으로 밀어주기 시작했다. 이효상은 1963년 국회의장으로 피선된 뒤로 8년(6대, 7대)동안 의장직을 지켰으며, 1972년에는 유신체제 아래서는 민주공화당 당의장 서리, 당 총재 상임고문 등을 맡으며 1979년 박정희 대통령이 죽을 때까지 17년 동안 요직에 있었다.
이효상은 1963년 대통령 선거에서 윤보선과 힘겹게 다투던 박정희 후보의 선거연설회에서 대구지구당 위원장 자격으로 사회를 맡아보면서 박정희에게 능력을 인정받았으며, 당시 계파로부터 자유롭다는 점에서 박정희의 신임을 받아 국회의장이 되었다. ‘박정희의 사람’으로 분류되는 이효상은 박정희 집권 전반부인 8년동안 국회의장을 맡으면서 박정희 정권의 정치적 안정기반을 마련한 1969년 3선개헌안을 날치기로 통과시켜 박정희의 영구집권의 길을 열어주었다.
한편 대구교구 소속의 <가톨릭시보>는 이미 교구를 초월한 신문임을 표방했으면서도 상당 부분 대구교구의 입장을 대변했는데, 특히 정치적 사안에 대해 예민하게 반응했다. 이때 다시 등장한 것이 해묵은 교회의 ‘정교분리론’이다. <가톨릭시보>는 1963년 3월 16일자 ‘정치체질 개선의 본뜻-우리는 전환기에 서있는가’라는 사설에서 “교회는 현실정치에 직접 간여하기를 극력 피하고 있으며 교회 안에서 특히 공식장소에서 정치에 언급하거나 사담으로라도 교회 울 안에서 그런 것을 비친다면 좋은 표양이 아니”라고 지적하고, “정치의 실제 및 사례에 대한 불간섭원칙을 명심하고 교회의 발언은 항상 원리원칙에 입각한 간접적인 기본을 벗어나지 말아야 한다”고 말했다. 정치질서를 바꾸려 하기 전에 먼저 참 신자가 되자는 것이다. 실상 대구교구에는 아주 오랫동안 대사회적 문제를 다루는 교회기구인 ‘정의평화위원회’가 없었다.
그후 한국사회와 교회가 민주화운동에 동참하는 과정에서 숱하게 들을 수 있듯이, 이효상으로 대변되는 대구교구와 <가톨릭시보(가톨릭신문)><매일신문> 등 교계언론은 반공주의라는 상수만 붙든 채 민주주의의 가치를 완전히 상대화시키는 길로 접어든 것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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