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더풀 크리스마스, 예수님은 늘 문밖에서 서성거릴 뿐인데

한상봉의 너에게 가고싶다: 지상에서 영원한 하늘을 갈망하는 길 찾기-45

2021-04-12     한상봉 편집장

전라도 무주 땅이었다. 눈이 펄펄 내리던 날 그 아이가 우리 부부에게 선물로 주어졌다. 벌써 초등학교 5학년이니, 때 이른 사춘기가 시작되어 ‘아빠’ 말도 잘 듣지 않고 제 고집을 피우고, 때로는 오히려 훈계하기를 마다하지 않는 어린 딸내미를 키우며 생각이 많다.

1999년 가을, ‘아수라장’인 서울 탈출을 감행하고, 경북 상주를 거쳐 전라도 무주에 귀농하였을 때 그 첫 수확이 딸아이였다. 그러므로 이 아이는 밀레니엄 베이비인 셈이다. 미국의 리 캐롤과 잰 토버가 1999년 봄에 출판한 <인디고 아이들>이란 책에서는 “인류의 진화사에서 새로운 유형의 아이들이 속속 태어나고 있다”고 전한다. 우리 아이도 그런 아이일까?

인디고 아이들(indigo children)은 매우 독특한 사고방식의 소유자이며 각기 어떤 천재성을 내포하고 있다는데, 지금까지 인류가 “나는 누구인가?”를 알려고 애썼다면 인디고 아이들은 “나는 누구이다”를 표현하기 위해서 태어난다고 했다. 이 아이들은 자신이 고귀하다는 느낌을 지니고 행동하며, 종종 부모에게 “당신은 누구입니까”라고 묻기도 한다. 절대적인 권위에 반항하고 창조적으로 생각하며, 관료적인 분위기를 견디지 못한다고 전한다. 그래서 다시 한 번 묻는다. 우리 아이도 그런 아이일까?

하느님께서 아이를 건네 주셨을 때 우리 부부는 그 아이를 ‘선물’로서만이 아니라 ‘손님’으로 받아들였다. 우리의 초대에 응해서 지상에 손님으로 온 아이였기에, 우리의 책무는 그 아이가 원하던 대로 지상을 잘 순례할 수 있도록 뼈를 단단히 하고 생각을 맑게 하고, 마음을 따뜻하게 여미도록 돕는 것이었다. 그래서 아이에게 ‘미쉘’(미카엘)이 란 세례명을 지어 주고, 업어 재울 때마다 미카엘 대천사와 그의 동료인 가브리엘, 라파엘 대천사에게 도움을 청했다.

평화의 사자이신 성 미카엘을
주께서 우리 집에 보내주시면
친밀히 우리에게 오실 때마다
우리의 마음행복 커져 가리라.

하늘의 용사이신 가 브리엘이여,
우리집 자주 찾아 방문하시며
결이(미쉘)를 인자로이 도와주 소서.

하늘의 의사이신 라파엘 천사,
하늘서 우리에게 내려오시어
갖가지 질병일랑 고쳐 주시고
우리의 생활 지도 맡아 주소서…….

이 아이의 생일이 12월 28일. ‘무고한 아기들의 순교 기념 축일’이다. 예수님은 무고하게 십자가에서 돌아가심으로써 이 아기들과 운명을 나누어 가졌다. 죄 많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 죄 없이 죽은 이가 태어난 날은 12월 전라도 무주처럼 아마 눈이 펑펑 내려, 어수선한 세상을 포근히 덮어 주었을 것이다. 아니라면 짙은 안개에 덮인 채 척박한 땅에 돋은 풀잎들을 적셔 주었을 것이다. 더더욱 가난한 이들의 마을에 축복처럼 총총히 별을 박아 두셨을 것이다.

 

원더풀 크리스마스, 성탄절이 ‘놀라운’ 것은 ‘만군의 주님’이란 분이 가난한 시골 처녀의 태중에 잉태되었다는 것이다. 마구간처럼 그런 누추한 곳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다. 하물며 사람의 집이 아닌 짐승의 집에서 짐승의 먹이로 구유 위에 말밥으로 오셨다는 것이다. 그중에서도 어느 누군가의 도움이 없이는 한시도 목숨을 부지할 수 없는 벌거벗은 아기로 오셨다는 것이다. 어느 학자는 예수가 적빈(赤貧)이었다고 소개한다. 벌거벗은 가난, 그 안에서 가장 위대한 생명이 창조된 것이다, 성령의 힘으로. 

세상의 모든 아기들이 그처럼 성령으로 ‘말미암아’ 잉태되었다. 성령으로 ‘말미암지 않고는’ 어떤 아기도 지상에 돋는 풀꽃처럼 태어날 수 없다. 그러니 그 예수아기처럼 세상의 모든 아기들은 ‘사실상’ 복음이다. 그리고 그 아기를 찾아온 이들이 다름 아닌 목동들이었다고 복음서는 기록하고 있는데, 목동이라면 먼저 두 가지 의미를 지닌다. ‘어둔 밤을 지새우며 새벽을 갈망하는 이들’이며, 간밤에 도둑질을 한다 해서 유다인들이 꺼리던 ‘부적절한’ 이들이 바로 목동이었다. 가난이 죄라서, 죄를 짓는 이들이 예수아기를 찾아와 경배했다. 다시는 사람이 죄 지을 이유가 없는 세상을 이루기 위해 세상에 오신 분이 그분이시기 때문이다.

예전에 ‘노숙인다시서기센터’에서 일하시던 어느 성공회 신부님이 들려주신 이야기가 있다.
“서울역 화장실에서 해산한 노숙인 여인을 만났다. 화장실에서 태어난 그 아이를 부여안은 그 여인에게도 출산은 복음인가?”

화장실에서 태어난 아기 역시 성령으로 말미암은 축복 가운데 태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지 물었다. 그 아기와 노숙인 여인에게 ‘원죄 때문’이라고 윽박지를 수 있을까? 그렇지 않다. 죄 없이 태어난 그 아기는 예수아기처럼 누군가의 손길을 기다리며 오히려 인간에게 기도하는 하느님의 모습을 닮아있다.

하느님께서 하느님이심을 고집하지 않으시고 사람이 되셨듯이, 그분은 우리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에게 하실 말씀이 있다는 것이다. “보잘 것 없는 한 사람에게 해준 것이 곧 내게 해준 것”이라던 예수라면, 응당 “화장실에서 태어난 그 아기가 바로 나다”라고 말씀하실 것이다. 그 아기를 기억하지 못하는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은 불행하다, 하느님의 자비를 체험할 수 없으리니. 성탄절 아침에 구유 안에 벌거벗은 아기로 누워 계신 예수상을 경배하면서, 정작 살아서 안타까운 목숨을 어쩌지 못하고 있는 이들을 돌보지 않는다면, 우리의 신앙은 불순하다.

이런 점에서 예수는 늘 ‘불청객’이다. 성탄절이 가까워 올수록 교회와 그리스도인은 ‘저들만의 크리스마스’를 즐기면서 ‘불청객’을 맞이 할 수 있는 여백을 만들지 않는다. 그는 늘 다른 모습으로 문밖에서 문을 두드리고 있지만 회원권이 없으면, 한아름 선물을 손에 쥐고 있지 않는다면, 허름한 옷매무새로 냄새가 난다면 입장할 수 없는 ‘그럴 듯한 자들만의 크리스마스’여서, 예수님은 늘 문밖에서 서성거릴 뿐이다.

우리들의 크리스마스는 ‘백화점’에서 가장 성대하게 베풀어진다. 서울 시청 앞 현란하게 번쩍이는 트리 안에서 선포되고, 성당에서 고만고만한 사람들끼리 모여 예수아기를 ‘독점적으로’ 기념한다. 이들에게 가난한 그리스도는, 정성껏 제대 옆이나 성당 마당에 만들어놓은 ‘구유’로 족하다. 그리고 가난이 더 이상 구체적으로 성당을 밀고 들어오지 못하도록 기도하고 간청한다. 건강과 부유함이 신앙의 크기와 비례한다는 개신교의 ‘번영신학’이 어느새 가톨릭 교회 안에서도 힘을 얻고 있는 까닭이다.

이참에 다시 그리운 것은 요한 23세 교종과 김수환 추기경이다. 요한 23세 교종은 성탄절엔 밤비노의 ‘예수아동병원’에 찾아가 아이들 을 만났으며, 이튿날에는 레지나 첼리 감옥으로 가서 죄수들에게 인사했다. “여러분이 내게 올 수 없어서 내가 여러분에게 왔습니다!” 하고 환한 미소를 건네며. 김수환 추기경 역시 성탄절이면 철거민촌을 찾았다. 물론 의례적인 사목 방문이 아니라, 한시라도 가난한 이들을 잊지 않기 위한 착한 목자의 모습이었다. 예수아기가 오히려 그곳에 머물고 있었기 때문이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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