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제-정치 권력보다 더 나쁜 것이 종교권력이다

헨리 나웬의 "우리를 초대한 길들"-6

2020-09-16     헨리 나웬

하느님이 우리세계를 바라보실 때에 그분은 우신다. 왜냐하면 권력에 대한 욕망이 인간정신을 함정에 빠뜨리고 타락시키기 때문이다. 감사하는 마음보다 회한이, 칭송보다는 비판이, 용서보다는 응징이, 치유보다는 상처 입힘이, 연민보다는 경쟁이, 협력보다는 폭력이, 사랑보다는 엄청난 두려움이 우리들의 세상에 만연되어 있다.

하느님은 우리의 아름다운 행성을 보시면서 우신다. 수 천명의 부상당한 사람들이 전쟁터에 널려있고, 대도시의 길가를 방황하고 있는 외로운 아이들, 창살너머에 갇혀있는 죄수들, 대형시설의 작은 방에서 시간을 보내고 있는 정신적으로 아픈 이들, 그리고 수백만의 사람들이 굶주림과 소외 때문에 죽어가고 있는 현실을 보시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우리가 우리 자신의 운명을 좌지우지하려고 할 뿐만 아니라 다른 이들을 지배하기 위하여 스스로 우리 자신을 옭아매고 고통스러워하는 것을 알고 계시기 때문에 우시는 것이다.

우리 주변을 바라보고 우리 자신들을 하느님의 눈으로 바라보게 될 때에 권력에 대한 끝없는 욕망을 발견하기가 어렵지 않다. 왜 세르비아사람들은 모슬렘들을 죽이는가? 왜 개신교인과 가톨릭인들은 서로에게 폭탄을 퍼붓는가? 왜 스리랑카의 대통령은 암살 당하고, 벨지움의 총리는 유괴되며 프랑스의 정치지도자는 자살하는가?

 

사진출처=pixabay.com

이제 우리자신의 마음속도 들여다보자! 우리는 끊임없이 누구의 주의를 끌고 있는가 아닌가에 매달려있지 않은가? 우리자신이 인정받는가 아닌가, 보상을 받는가 아닌가에? 우리는 언제나 우리 옆에 가까이 있는 사람보다 더 나은가 아닌가, 더 강한가 약한가, 더 빠른가 느린가를 스스로에게 묻고 있지 않은가? 초등학교시절부터 대부분의 우리 동료인간들이 성공, 영향력 그리고 인기의 경주에 있어 경쟁자임을 경험해오지 않았던가? 그리고... 우리자신에 대해 너무나 불안한 나머지 우리자신이 누구이고 무엇을 하며 어디로 가는지에 대해 조금이라도 지배할 수 있게 해주는 어떤 형태의 힘이든지 움켜쥐려고 하는 우리들이지 않은가?

하느님의 눈으로 기꺼이 주변을 바라보려고 하면, 보스니아, 남아프리카, 아일랜드 혹은 로스 엔젤로스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이 우리자신의 마음속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과 그다지 다른 일이 아니라는 사실을 곧 알게 될 것이다. 우리자신의 안전이 위협받는다싶으면 우리는 먼저 지팡이나 총을 움켜잡으면서 수천 명의 다른 사람들이 생존할 수 없게 되어도 우리자신의 생존이 참으로 중요하다고 말한다.

나는 나의 지팡이와 총을 알고 있다! 때때로 그 지팡이는 나보다 더 많은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친구이며, 때로는 돈이나 학위, 또 때로는 다른 이들이 갖지 못한 약간의 재능일수도 있고 어떤 때는 특별한 지식, 혹은 숨겨진 기억, 심지어 차가운 시선일 수도 있다... 그리고 지배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될 때에 주저 없이 그 지팡이를 재빨리 움켜잡는다. 내가 그 사실을 완전히 깨닫기도 전에 나는 나의 친구들을 밀어내는 것이다.

하느님은 우리를 바라보고 우신다. 우리가 자존심을 세우기 위하여 힘을 사용할 때마다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떨어지고 이웃으로부터도 분리되며 우리의 삶은 악마적이 되는데(diabolic), 이 말의 본래의미는 불화를 일으키는, 구분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경제적 정치적 권력보다 더 나쁜 것이 있다. 그것은 종교적인 권력이다. 하느님이 우리세계를 바라보실 때에 그분은 우실 뿐만 아니라 분노하신다 - 왜냐하면 기도하고 찬미를 바치는 수많은 사람들, “주님, 주님!” 하고 하느님을 찾는 수많은 이들 또한 권력에 의해 부패되고 있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말씀하신다: “이 백성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그들이 나를 공경한다 하여도 사람들에게서 배운 관습일 따름이다”(이사 29,13)

가장 교활하고, 분리적이며 상처를 주는 권력은 하느님을 섬기는 데에 사용되고 있는 권력이다. 나는 “종교 때문에 상처받은” 수많은 사람들을 보고 충격을 받는다. 목사나 신부의 차가운 말 한마디, 어떤 생활방식에 대한 교회의 비판적 발언, 사람들을 식탁에 못 앉게 하는 거부, 아플 때나 임종 때에 함께 있지 않음, 그리고 기타 다른 어떤 세상의 거부보다도 더 오래 동안 사람들의 기억 속에 남아 상처를 주는 수많은 다른 거부들이 있다. 별거와 이혼한 수천의 남녀들, 수많은 동성애자들, 그리고 그들의 형제자매들이 예배하는 집에서 환영받지 못한다고 느끼는 노숙자들 모두가 하느님으로부터 돌아선다. 그들은 사랑의 표현을 기대할 때에 권력이 대신 휘둘러지는 것을 경험했기 때문이다.

십자군전쟁, 유대인학살, 인종차별정책 그리고 지금까지 계속되는 오랜 종교전쟁들을 생각할 때에 하느님의 백성들이 사용하는 힘의 파괴적인 영향은 매우 분명해진다. 그러나 현재의 수많은 종교적 움직임들이 이러한 엄청난 인간 비극들이 또다시 발생하는데 매우 적절한 토양을 만들어내고 있다는 사실을 감지하기는 더 어려운 일인 것 같다.

“이 백성들은 말로만 나와 가까운 체하고
입술로만 나를 높이는 체하며
그 마음은 나에게서 멀어져만 간다.”
(이사 29,13
)

지금과 같이 경제적, 정치적으로 매우 불확실한 시대에 가장 큰 유혹들 중의 하나는 우리가 가진 신앙을 다른 이들에게 힘을 행사하는 한가지 방법으로서 사용하는 것인데,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는 하느님의 계명을 인간의 계명으로 대신 이식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수많은 사람들이 종교와 조금이라도 관련이 되었다싶으면 거부함이 생겨 돌아서 버리는 것을 이해하기가 어려운 일은 아니다. 기쁜 소식을 선포하기 위하여 힘이 사용되면 그 기쁜 소식은 곧바로 나쁜, 매우 나쁜 소식이 되어버린다. 그리고 바로 그 사실이 하느님을 분노케 한다.

그러나 하느님은 단지 슬프고 분노에 찬 눈으로 우리세계를 바라보기만 하시지 않는다; 하느님의 자비는 그분의 슬픔과 분노보다 훨씬 더 크다. 시편 작가가 말하듯이: “하느님의 분노는 잠시 뿐이다”(시편 30,5). 당신의 무한한 자비로 하느님은 무력함을 통하여 모든 악의 힘을 해제시키기로 선택하신다, 당신자신의 무력함으로.

나자렛의 예수를 통하여
무력한 하느님은
권력의 환상이 지닌 가면을
벗겨버리기 위하여
우리들 가운데에 나타나셨다.

헨리 나웬(Henri Jozef Machiel Nouwen, 1932-1996)은 네덜란드 출신의 로마 가톨릭사제이자 사목신학자이며 그리스도교 영성가로도 널리 알려져 있다. 토머스 머튼, 렘브란트, 빈센트 반 고흐, 장 바니에 등의 영향 아래 자신의 전공인 심리학을 바탕으로 활발한 강연 활동을 펼쳤으며 다양한 주제에 관한 저술을 남겼다.(출처:위키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