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우구스티누스의 고백, 하느님 향한 목마름

유대칠의 뜻으로 읽는 교회사-2

2020-06-02     유대칠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자신의 내적 성찰을 통하여 <고백록>이란 작품을 남겼다. 가장 대중적인 신학 서적이며 철학 서적이다. 그 내용의 무게감이 가볍지 않지만, 여전히 많은 이들 사이에 읽히고 있다. 한국어로도 다수의 번역이 나와 있을 정도로 먼 이국의 땅인 한국에서도 그의 <고백록>의 고민은 나름의 울림을 가지고 있다. 아우구스티누스라는 한 사람, 그 홑사람의 고민이 21세기를 살아가는 지금의 나에게도 뜻있는 무엇으로 다가오는가 보다.

아우구스티누스는 내적 성찰은 <고백록>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여러 저작에서 자신을 돌아본다. 어쩌면 그의 철학은 그 ‘돌아봄’의 과정으로 이루어져가는 것이라 보아도 틀리지 않은 듯하다.

‘나’라는 존재는 순간순간 흩어진다. 이젠 아무 것도 아닌 듯이 여겨지기도 한다. 그리고 사랑하던 연인은 지금 어디서 무엇을 하는지 모르는 남이 되어 있다. "이것 아니면 안 된다"는 나를 지배하는 이데올로기도 지금은 말장난에 지나지 않아 보이기도 한다. 그렇게 한때 그리도 나를 지배하고 움직이던 것들이 허망하게 사라지고 말았다. 남은 것은 그 모든 것이 나의 모두라 생각하며 살아온 바보 같은 나뿐이다. 그러니 허망하다.

<고백록> 속 아우구스티누스 역시 쉼 없이 무엇인지 집중하여 최선을 다해 파고든다. 헬라 철학에 빠져 들어 신플라톤주의 철학과 스토아 철학 빠져 그 가운데 자신을 잡아줄 무엇인가를 궁리하기도 하였다. 이성의 승리를 외치는 철학들 속에서 얻은 것은 여전히 남은 허망함, 비워져 있음이었다. 열심히 파고 들었지만, 그는 여전히 채워지지 않은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 모든 노력들은 우리가 알고 있는 아우구스티누스가 되어가는 과정이었다.

그는 치열하게 고민하고 고민했지만, 그것이 자신을 채우지 못하면, 다시 시작했다. 그는 그런 사람이었다. 고집하지 않았다. 아집에 빠져, 혹은 소비한 지난 세월이 아까워, 자신이 처음 한번 선택한 것을 유일한 답이라 고집하지 않았다. 그런 그의 깨우침은 <고백록>의 첫 글귀에서 읽을 수 있다.

“주여! 위대하시며, 크게 찬미 받으실 분이시여! 당신의 능력은 위대하시며, 당신의 슬기는 도저히 헤아리지 못하겠나이다. 그리고 당신께서 창조하신 것 가운데 한 조각인 사람이 당신을 찬양하길 원하나이다. 사람은 자신이 죽을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품고 있으며, 자신이 지은 죄의 증거 그리고 당신께서는 오만한 이를 물리치신다는 증거를 품고 살아갑니다. 그럼에도 당신이 창조하신 것 가운데 한 조각인 사람은 당신을 찬양하길 원하나이다. 당신은 우리가 당신을 찬양하며 기뻐하도록 움직이십니다. 왜냐하면 당신께서는 우리를 당신을 향하도록(ad te) 지으셨습니다.” (아우구스티누스, 고백록, 1.1.1 (유대칠 옮김))

사람은 실수로 가득하다. 그것을 품고 있는 존재다. 미완의 존재다. ‘나’라는 작은 한 사람만이 그런 것이 아니라, 사람의 지난 역사를 봐도 그렇다. 수많은 실수들로 가득하다. 때론 가해자가 되고 때론 피해자가 되면서 그렇게 살아왔다. 하지만 그럼에도 사람은 완성을 향한다. 그냥 미완의 존재, 그 자리가 자신의 자리라 머물지 않고 더 완성된 존재를 향하여 한걸음 또 한걸음 나아간다. 그것이 실수로 가득한 사람의 또 다른 모습이다. 그냥 미완의 존재에 머물지 않는다. 왜일까?

아우구스티누스의 깨우침에 따르면, 사람이 하느님을 향하도록, 하느님께서 사람을 창조하였기 때문이다. 하느님은 사람에게 끝없는 비워짐의 자리를 마련해 두었다. 그것이 우리 혼 가운데 있다. 맛난 것을 아무리 많이 먹어도 그 비워짐은 온전히 채워지지 않으며, 이 세상 아무리 대단한 권세라도 그 비워짐을 채울 순 없다. 아무리 대단한 지식을 익히고 누려도 마찬가지다. 채울 수 없다.

하지만 그 비워짐은 사람에게 절망감을 주기 위함이 아니다. 오히려 그 비워짐은 ‘하느님을 향한 목마름’의 자리다. 한사람으로 태어나 한사람으로만 살다 죽는 것이 아니라, 즉 한사람으로 태어나 한사람의 욕심만을 누리며 그 누림 속에서 자신의 존재를 자각하는 나의 욕심 속에 구속된 존재가 아니라, 그것을 넘어설 수 있는 존재로 디딤돌을 디딜 수 있는 까닭은 바로 그 비워짐의 자리, ‘하느님을 향한 목마름’ 때문이다.

그 목마름은 나의 목마름이지만, 남보다 더 많이 소유하고 남보다 더 높은 곳에 올라선다고 해결되는 목마름이 아니다. 그 목마름이 해결되는 공간, 하느님을 향해 다가가는 공간, 바로 그 공간은 ‘이기적 사랑’, ‘나밖에 모르는 사랑(amor privatus)’이 아니라, ‘더불어 살아가는 사랑(amor socialis)’으로 조금씩 해결될 수 있다.

오직 자기 자신만 아는 얕은 사람인 ‘홑사람’으로의 삶도, 뭇사람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섰다는 ‘난사람’으로의 삶으로도 이루지 못한다. 누군가보다 ‘더’라며 남을 이기고 서는 방식으로는 이루지 못한다. 결국 홀로 있음이 아닌 더불어 있음으로 이루어진다. 그렇다면 결국 하느님을 향한 목마름, 하느님을 향한 그리움 가득한 그 끝없는 비워짐은 홀로 남보다 더 많이 가지고 더 높이 올라섬으로 이루는 것이 아니라, 더불어 나아갈 때 다가온다는 말이다.

교회사의 많은 순간들, 그 순간 속에서 정말 기억해야하는 순간들은 바로 이런 순간들이다. 그리스도교는 혹시나 홀로 자기만 답이라며 내세우고 있지 않았나. 하느님을 향한 목마름을 해결한다며, 홀로 자신만 더 많이 누리며 남의 아픔은 돌아보지 않은 그런 삶을 살지는 않았나. 그리스도교는 정말 제대로 더불어 있었는가? 정말 하느님의 뜻은 그런 홀로 있음이 아닌 더불어 있는 우리 모두에게 찾아오는 것임에도 말이다.

<고백록>에서 아우구스티누스는 자기 혼 가운데 끝없는 비워짐을 발견했다. 그리고 <신국론>에서 그는 그 비워짐이 ‘이기심’이나 ‘나밖에 모르는 사랑’으로 도저히 해결되지 못함을 발견하였다. 그에게 정말 제대로 하느님의 ‘뜻’이 녹아든 ‘참사람’의 공간인 ‘하느님의 나라’는 홀로 천국에 가겠다며 남의 아픔이나 사회의 고난에 등 돌리고 선 이들의 공간이 아니라, 타인의 아픔에 고개 돌리지 않는 더불어 있음의 공간임을 우린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유대칠 암브로시오
중세철학과 초기 근대철학을 공부한다.
대구 오캄연구소에서 고전 세미나와 연구, 번역을 하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