뜰에, 마음에 불꽃나무 한 그루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9

2020-05-04     한상봉

가을걷이가 끝나고 처마에는 수수와 시래기를 만드느라 무청이 걸렸다. 가을농사라 부르는 마늘과 양파 모종도 심었고, 겨우내 얼지 말라고 그 위에 볏짚도 깔아주었다. 새로 이사올 후배의 집은 거의 다 짓고, 도배만 남겨두고 있다. 농사와 집을 짓거나 고치는 일은 지난 4년여 시골살이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었다. 그리고 이런 일들은 사람이 먹고사는 바탕이 되는 것이기에 특별한 정성이 필요하다.

누군가 ‘일은 노동·작업·근로 등의 낱말과 달리 몸과 마음이 온전히 하나가 된다는 뜻에서 일’이라고 표현한 적이 있었다. 생계 때문에 또는 취미로는 ‘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것이다. 그래서 일을 하지 않고서는 온전한 ‘사람’이 될 수 없으며, 반편 인생을 사는 셈이 된다. 정성을 다해 일하고, 그 일을 통해 제 영혼이 함께 성장하며, 결국 하느님께 봉헌된 삶을 완성하는 것이다.

최근엔 바깥 나들이할 기회가 많았다. 바오로딸에서 묵상집 공동작업을 하자는 제의가 들어와 한 주일을 양평·양덕원·서울의 수녀원에서 지냈다. 며칠 동안 식사시간과 잠을 잘 때를 빼고 꼬박 책상 앞에 앉아 있었는데, 하루를 온전히 묵상하고 글을 쓰는 데 바쳐본 것은 참으로 오래간만에 맞은 경험이었다.

예전에 서울에서 잡지 만드는 일을 할 때는 하루 종일 책상 앞에 앉아서 원고를 다듬거나, 전화기를 붙잡고 누군가와 한참을 이야기 나누고, 일과가 바쁘지 않으면 미루어 두었던 책을 읽었다. 그러나 시골에 사는 것은 전혀 달랐다. 해가 떠 있는 동안엔 무엇인가 일을 해야 하고, 방에 앉아 책을 읽노라면 왠지 마음이 불안하다. 해야 할 일을 안 하고 있다는, 어떤 강박관념 같은 것이 생기는 것이다. 아이가 생긴 뒤로는 틈나는 대로 아이와 ‘놀아주는 것’도 중요한 일과가 되었다. 그런데 어느 때는 아이와 기꺼이 노는 게 아니라 마치 의무감에 이끌려 ‘놀아주는 것’이 되면 사는 게 퍽 피곤한 일이 된다.

수녀원에서 꼬박 3박4일 동안 손님방에 컴퓨터를 들이고 원고를 썼는데, 이것 역시 엄청난 작업이었지만 내 정신력의 한계를 엿볼 수 있는 기회가 되었다. 그리고 서울에서 살 때, 어떻게 그런 일을 매일같이 할 수 있었는지 새삼 놀랐다. 마지막 날에는 새벽 3시까지 작업해서 원고를 마무리했다. 그리고 잠깐 눈을 붙이고 쉬다가, 6시에 수녀원 성당에 가서 수녀님들과 함께 미사에 참례했다. 새벽미사는 한마디로 ‘참 좋았다’. 이런 영적 에너지를 매일같이 받고 사는 수녀님들은 일을 하면서, 그 일의 의미를 적어도 새벽마다 새겨볼 수 있겠다 싶었다. 그렇게 진지하면서 기쁘게 사는 방법을 그들은 터득하면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이철수,

며칠 만에 집에 돌아와 새로 지은 시골집 작업실을 더 아늑하게 꾸미고 싶어졌다. 우리 몸이 하느님이 머무시는 거룩한 장소라고는 하지만, 아무래도 집 한구석에 성소를 마련해 두는 것도 필요하겠다. 그래서 작업실 한쪽 벽면을 치우고, 마침 뒷집 영미씨가 선물로 준 벽그림을 걸고, 다른 소품들도 적당히 배치했다. 얼마 전에는 그 방 격자 창문 위에 ‘뜰에, 불꽃나무 한 그루’라는 이철수님의 판화를 붙여놓았는데, 아내가 무슨 부적 같다면서 떼기를 요구한 적이 있었다. 애초에 마음속에선 부적 같은 효과를 기대한 것이 사실이었지만, 정작 아내가 그 의도를 꼭 집어 말하니 난감했다. 나는 ‘마음에 불꽃나무 한 그루’를 지니고 살고 싶었다.

세상이 생각보다 냉혹하고, 내 마음이 인간관계와 생활고에 부딪쳐 어지러울 때, 이 모든 장애를 태워버릴 불꽃나무 한 그루 있었으면 좋겠다. 일종의 정화의 불길일 텐데, 묵은 상념을 불살라 버리지 않고서는 말끔한 얼굴로 매일을 새롭게 시작할 길이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과거에 끄달려 살지 않고, 내일을 위해 나를 조금은 가볍게 뛰어넘을 수 있는 어떤 힘이 필요했던 모양이다.

어머니 태중에서부터 시작된 천주교 신앙이 그동안 삶을 받쳐주었다고는 하지만, 그걸 내 의식 수준에서 다시 정화하여 나만의 거룩한 에너지로 형상화할 수 있는 기회가 주어지길 기대한다. 결국 그 판화는 내 책상 한 귀퉁이에 올려놓는 것으로 타협을 보았다. 내가 책을 읽을 때나 글을 쓰거나 차 한잔 마시며 멍청하게 앉아 있을 때, 그 불꽃나무가 어떤 감흥을 주리라 생각한다.

민주화운동을 하다가, 10여년 동안 감옥살이를 했던 김남주 시인이 ‘장난’이라는 시를 쓴 적이 있는데, 그 ‘다람쥐 꼬리만한 햇살’이 어쩜 이 불꽃나무와 연결되어 있는지 모르겠다.

"감방
문턱 위에
걸쳐 있는
다람쥐 꼬리만큼한 햇살
삭둑삭둑 가위질하여
꼴깍꼴깍 삼키고 싶다
언 몸 봄눈 녹듯 녹을 성싶어."

스산한 계절을 견디게 하는 힘은 거창한 것이 아니어도 좋을 것이다. 누추하고 무거워진 가장의 어깨를 툴툴 털게 하는 것은 아이들의 죄 없이 천진한 웃음이다. 비열하거나 산만해진 정신을 맑게 게우는 것은 쨍하게 푸른 하늘이다. 세상일에 시달려 거칠어진 마음을 부드럽게 풀어주는 것은 늙은 어머니의 거칠지만 여전히 따뜻한 손길이다. 이 모든 것은 본질적으로 마음속의 불꽃나무에 뿌리를 대고 있는 것 같다. 어떤 신성한 불꽃, 거룩한 사랑에 접속되어 있다고 믿는다.

김장도 끝나고, 겨울채비가 대충 마무리된 것 같다. 이제 산골 사람들은 길고 긴 겨울 안거(安居)에 들어갈 것이다. 곰처럼 겨울잠을 자면서 몽상을 많이 하게 될 것이다. 얼마 전에 들으니 올해는 비교적 따뜻하지만 눈은 평소보다 많이 내릴 거란다. 항상 겨울이 다가오면 거듭 다짐하는 바이지만, 올 겨울엔 제발 책을 좀 많이 읽었으면 좋겠다. 처음 귀농할 때 이상으로 삼았던 ‘주경야독’이 실상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기 때문이다.

낮에 일한 만큼 저녁엔 쉬어야 하며, 함께하지 못했던 아이들의 놀이에도 참여해야 한다. 그래서 겨울이면 ‘주야독서(晝夜讀書)’를 꿈꾸곤 한다. 밤낮없이 이른바 마음의 양식을 얻기 위해 씨를 뿌리고, 그동안 못 만났던 사람들을 찾아다니며 그 씨앗에 양분을 주고, 이윽고 봄빛이 여물면 겨우내 수고했던 마음의 양식을 수확하여 봄·여름·가을 세 계절을 감당하리라 생각한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