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가 우리에게 선물처럼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4
아이가 잠이 들면 우리도 잠잘 준비를 해야지 하며 봄이라지만 아직 추운 산골 흙방에서 아내와 나는 이불을 덮고 눕는다. 보안등도 없는 마을에서 전깃불을 끄고 나면 온 세상이 까맣게 쓰러진다. 달 그림자조차 기척하지 않는 그믐밤이면, 바깥세상이나 방안이나 구별 없이 아무것도 보여주지 않는다. 그러면 소리에 무척 민감해지고, 오늘처럼 비가 추적추적 내리는 밤이면 낙숫물 떨어지는 소리에 잠시 귀를 세우게 될 것이다, 잠이 눈꺼풀을 쓸어 내릴 때까지. 얼마 전에는 유난히 잠이 오지 않아 이불을 목까지 끌어올리고, 캄캄한 방안에서 아내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사람은 나를 찾아와 줄까?
만일 우리가 죽는다면, 가족들은 제외하고 전라도땅 무주 산골집까지, 만사를 접어두고 달려올 사람이 있겠느냐는 것이었다. 먼저 아내가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부르며 헤아려 보았다. 아마 ‘반드시’ 올 거야!라고 여겨지는 사람은 이런저런 인연을 통틀어 스무 명 정도 되었다. 다음엔 내가 헤아려 보았다. 아무래도 아내보다는 사회활동 경험이 많으니 얽히고 설킨 인연도 많을 것이고… 서른 사람쯤 되었다. 처음엔 얼른 떠오르는 인물이 없어서 걱정했는데, 구석구석 따져보니 생각보다 많았다. 물론 예의상 찾아올 만한 사람은 뺀 숫자였다.
그러나 이것은 우스운 숫자놀음에 지나지 않음이 곧 드러났다. 그 사람이 정말, 정말 올까?라고 다시 되묻게 되면서 점점 자신이 없어진 것이다. 이윽고 무슨 일이 있어도 ‘반드시’ 올 사람이 세 사람으로 압축되었다. 그런데 희한하게도 그 사람들은 아내가 죽든 내가 죽든 마찬가지로 ‘반드시’ 올 사람이었다. 결론이 내려지자 슬그머니 유혹이 생겼다. 그 세 사람을 언제 한 번 만나면, 그런 경우에 꼭 올 거냐고 은근히 물어보고 싶어진 것이다. 이런 심리는 자신의 죽음에 대해서, 자신의 삶이 그래도 몇 사람에게는 충분히 의미가 있었을 거라는 보증을 받고 싶은 데서 나오는 것인지 모르겠다. 아니면 사는 게 너무 허망하지 않느냐는 불안감에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르겠다.
결국 우리는 잠을 설치며 캄캄한 밤중에, 별을 헤아리듯이 사람들을 떠올리며 ‘우리와의 관계’를 가늠해 보고 있었던 셈인데, 아득한 절망 같은 것을 감지하면서도 소득이 아예 없었던 것은 아니었다. 우리가 꼭 집어 호명한 사람 중에는 지금은 그다지 흔쾌하지 않은 감정의 벽을 두고 있는 사람도 있었고, 얼굴을 본 지 까마득하게 느껴지는 친구도 있었다. 그러나 이승을 떠나는 내 영혼을 찾아주리라 믿어지는 이 사람들이란, 우리 마음의 바닥에 가라앉아 있는 깊고 질긴 인연의 앙금이었음을 깨달았던 것이다. 그리고 소중한 사람을 감정적으로 억압하였거나 내버려두고 있었다는 것이다.
그런 혼란은 다음 이야기에서 확인되었다. 우린 곧바로 우리가 떠올렸던 그 사람들이 죽게 된다면 만사를 접어두고 그 사람에게 달려갈 것인지 자신에게 묻게 된 것이다. 아니었다. 그 사람들은 우리가 죽는다면 모두 찾아와 주리라 기대했지만, 정작 상대방의 죽음 앞에서는 흔쾌히 내 발걸음이 옮겨지지 않을 것 같은 사람들도 섞여 있었다. 결국 사랑의 흐름을 거부한 것은 나 자신이었음을, 내 사랑이 부족함을 알아차려야 했다. 그래서 캄캄한 방안에서, 우리 두 사람은 조금 쓸쓸하게 잠들었다.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글쓰기를 할 때마다 나는 시집을 뒤적거리는 습관이 있다. 습관이라기보다는 ‘필요’라고 말하는 것이 정직하겠다. 영감이 떠오르지 않을 때마다 나는 시인들의 상상력에 도움을 청해야 했다. 책상 앞에 앉을 때, 나의 정신은 빈곤하거나, 복잡하게 엉켜 있는 모양이다. 나는 신탁을 기다리는 사제처럼, 시인의 언어가 나를 불러줄 때까지 때론 조급하게 때론 진득하게 의자에 앉아서 책장을 넘기며 지루해하거나 팽팽한 긴장감을 느끼며 묵상에 돌입하기도 한다. 오늘은 박남준님의 <다만 흘러가는 것들을 듣는다>라는 시집을 머리에 새기고 있다.
시집을 책장에서 꺼냈을 때 갈피에는 몇 장의 사진이 꽂혀 있었는데, 그 중에서 ‘파이란’이란 영화의 한 장면을 담은 사진을 책상 위에 세워두고 시를 읽어나갔다. ‘아름다운 관계’라는 제목의 시가 눈에 들어왔다.
"……
뒤돌아본다
산다는 일이 그런 것이라면
삶의 어느 굽이에 나, 풀꽃 한 포기를 위해
몸의 한편을 내어준 적 있었는가 피워본 적 있었는가"
풀꽃 한 포기에라도 의미있는 존재로 남아 있고자 하는 게 아름다운 관계를 꿈꾸는 인간의 당연한 열망이라는 메시지가, 지난 밤 관계를 셈하던 자의 머리털을 잡아당기고 있다. 사람이란 당연히 누군가를 사랑해야 하고, 사랑받아야 하고, ‘사랑밖에 난 몰라’라고 말하는 데까지 깊어지고 높아져야 한다고 생각하면서도, 내 무의식은 좀 돌아서 가고 싶은 모양이다. 그만큼 사는 데 아직 많이 미숙하고 사랑하는 데 무력함을 느끼는 가련한 목숨이다.
그래서 자꾸만 눈길이 더 가는 시는 ‘아름다운 관계’가 아니라 ‘흰 부추꽃으로’라는 시다. 우리 텃밭에도 무성했던 부추밭이 가을에 흰 부추꽃을 피우다가 삭아내리고, 다시 푸른 싹을 지상으로 밀어 올리고 있다.
"몸이 서툴다 사는 일이 늘 그렇다
나무를 하다 보면 자주 손등이나 다리 어디 찢기고 긁혀
돌아오는 길이 절뚝거린다 하루해가 저문다
비로소 어둠이 고요한 것들을 빛나게 한다
별빛이 차다 불을 지펴야겠군
이것들 한때 숲을 이루며 저마다 깊어졌던 것들
아궁이 속에서 어떤 것 더 활활 타오르며
거품을 무는 것이 있다
몇 번이나 도끼질이 빗나가던 옹이 박힌 나무다
그건 상처다 상처받은 나무
이승의 여기저기에 등뼈를 꺾인
그리하여 일그러진 것들도
한 번은 무섭게 타오를 수 있는가
언제쯤이나 사는 일이 서툴지 않을까
내 삶의 무거운 옹이들도 불길을 타고
먼지처럼 날았으면 좋겠어
타오르는 것들은 허공에 올라 재를 남긴다
흰 재, 저 흰 재 부추밭에 뿌려야지
흰 부추꽃이 피어나면 목숨이 환해질까
흰 부추꽃 그 환한 환생"
어느 시에선가 ‘작고 가벼운 것들이 눈물겹다’면서 겨울이 오면 흰 눈발이 내 긴 잠을 덮을 것이라고 노래했던 박남준님은 부추꽃처럼 환하게 변신할 날을 기대하며 하얗게 날리는 재가 되기를 바란다. 서툰 발길을 거두고 아픈 상처를 태워서 새로운 영혼을 입고 싶은 것이다. 사람은 사는 동안 습관에서 자유롭지 않다. 습관처럼 인이 박힌 자기 연민에서 벗어나 세상으로 가슴 시원하게 열고 걸어나가길 원하지 않는 사람이 있겠냐만, 이내 허방을 짚고 마는 인생도 많다. 그래서 사랑도 훈련이 필요하다는 말을 하곤 한다.
이런 생각을 하다 보니 여전히 가슴 언저리가 시립고 쓸쓸하다. 오늘 밤 내리는 비는 실로 몇 주 만에 내리는 단비다. 시골길은 먼지만 풀풀 날리고, 감자는 심어놓았는데 비가 내리지 않아서 내심 걱정이 많았다. 창문 밖에선 푸른 댓잎이 빗줄기에 후들거린다. 이 밤 비 그치고 나면 봄빛이 더욱 완연해질 것이다. 진달래는 남은 꽃망울을 마저 터뜨릴 것이고, 길바닥에는 노란 양지꽃이 다투어 융단처럼 깔릴 것이다. 그러면 우리 마음이 조금 더 포근해지고, 늙은 무덤에 기대어 푸른 하늘을 순진한 눈으로 바라볼 수 있겠지, 하는 생각을 한다.
말하지 않아도 바람처럼 안기는 인연들이 있겠지, 하는 희망도 걸어본다. 그리고 생각한다. 십자가상에서 2000년 전 죽어가던 예수는 얼마나 쓸쓸하게 적막한 우주를 껴안았을까? 부활절 아침 알록달록하게 채색된 달걀을 받고 즐거워하는 아이들의 모습이 그에게 참 따뜻한 위로가 되었으면 좋겠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