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수 아저씨가 구해주셨어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33
요즘 결이가 한창 재미있어하는 놀이가 있다. 이불만 펴놓으면 이불 속에 숨자는 것이다. 컴컴한 이불 속에 얼굴을 파묻고 마치 동굴 속에 숨어든 아이들처럼 재잘거린다. 이불을 뒤집어쓰면 나는 으레 아이에게 옛날 이야기를 해달라고 주문한다. 그러면 아이가 항상 해주는 이야기가 있다. “옛날에 토끼가 있었어. 토끼가 막 산에 가다가 물에 첨벙 빠졌거든. 그래서 길수 아저씨가 토끼를 구해주셨어.” 다른 이야기를 하나 더 해달라고 조르면 주인공은 할아버지로, 곰순이로 매번 바뀌지만 결론은 똑같다. 물에 빠진 주인공을 길수 아저씨가 구해줬다는 것이다. 길수 아저씨란 아랫집에 사는 나의 동갑내기 친구인데, 몇 해 전 아랫집에 혼자 살던 처녀에게 장가와서 아들 별이를 낳고 살고 있다. 결이는 길수를 잘 따르고 좋아했는데, 물론 이유는 길수가 결이를 예뻐해 주는 까닭이다.
나는 결이에게 내용을 조금 바꿔서 ‘아빠’가 물에 빠진 토끼를 구해줬다고 해보라고 몇 차례 꼬이다가 포기했다. 아무리 이야기를 해도 아이는 한번도 말을 바꾸지 않았다. 도대체 아이의 무의식 속에 ‘길수 아저씨’가 어떤 상징으로 자리잡은 것일까? 아마도 하루아침에 그렇게 된 것은 아닐 텐데, 길수는 든든한 후견인으로서 뭐라고 떼를 써도 야단치지 않고 제 편이 되어줄 것이라는 믿음이 아이의 마음속에 뿌리내린 모양이다. 이건 어쩜 결이의 경우에만 해당되는 게 아닐 것 같다. 며칠 전 화천 산골짜기에 사는 아이 다섯이 아랫집에 놀러 왔는데 길수는 아이들에게 활도 만들어 주고, 칼싸움도 자청했다. 아이들은 대나무를 잘라서 만든 죽창을 들고 산골 언덕배기를 오르내리며 활극을 보여주었다.
지난 정월 대보름에는 마을에서 집집이 돌아다니며 덕담도 나누고 풍물도 쳐주었는데, 길수가 상쇠를 맡았다. 소리도 잘하고 풍물도 잘하는 길수 뒤를 징을 치며 따라다녔다. 길수는 아이들한테만 ‘인기’가 있는 게 아니고, 궂은일이 있으면 말없이 돕곤 해서 마을에서 무던한 사람으로 인정받는다. 무주 자활후견기관의 집짓는 일을 따라다니는 길수는 ‘원하는 곳에서 원하는 일’을 해주는 게 자연스레 몸에 밴 것 같다. 지난번 뒷산에서 나무를 할 때, 나무를 베긴 베었는데 옆에 있는 가지에 걸려 내리질 못했다. 낑낑거리던 차에 힘 좋은 길수가 나타나 도와준 적도 있었다.
언젠가 아내가 이런 말을 했다. “아이들은 잃어버린 사람의 본질을 일깨워 주기 위해 존재한다”는 것이다. 무슨 말인고 하니 아이들은 자신에게 집중해 주는 사람을 좋아한다는 것이다. 아이들은 상대방의 신분이 높고 낮음, 재산이 많고 적음, 지식이 있고 없음에 상관하지 않는다. 얼굴이 잘생기고 못생기고, 목소리가 곱고 거친지 상관없이 상대방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고 자신에게 그 순간 집중해 주는지 그것만 주목한다. 우리가 한 사람을 받아들이는 데 얼마나 많은 잣대와 배경을 들이대고 있는가, 생각하면 아이들은 그런 잣대의 부질없음을 본능적으로 알고 있는 것 같다. 세상이 억지로 가르치는 생존의 법칙과 굴레, 선입견에 물들지 않은 순수한 영혼의 상태를 보여준다.
얼마 전 대구 지하철 화재 참사가 발생했을 때 사람들이 죽어가면서 남긴 휴대폰 메시지는 ‘나 곧 죽을 것 같아. 사랑해’였다. 죽음을 예감하면서 우리가 인간과 세상에 던질 수 있는 마지막 한마디는 사랑한다는 것, 행복하라는 말 밖에 없었던 모양이다. 그 투명한 한마디 앞에서 다른 모든 것은 허물을 벗는다. 우리의 생애가 지속되는 이유는 그 말 한마디를 남기기 위해서다. 지금 대면하고 있는 존재를 온전히 받아들이고 그 순간 그에게 마음을 모아주는 것, 그것이 가장 숭고한 과업이라는 것을 잊지 않고 배울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아이와 함께 있을 때는 아이에게 집중해주고, 동료와 함께 있을 때는 동료에게 집중해 주고, 잠깐 생애의 한순간에 스치는 인연들에게도 온전히 집중해 주는 태도는 의식화 되지 않은 나의 그림자다. 그래서 그 그림자를 지닌 사람들을 만나면 부러워하면서도 몸이 따라주지 않는 것에 대해 화가 난다. 부끄러운 일이다.
부산 올리베따노 베네딕도 수녀회에서 나오는 「빛둘레」라는 회보가 있다. 거기에 조성옥 에노스 수녀님이 ‘들음’에 대해서 쓴 글이 있는데, 본회퍼 목사의 말을 빌려 ‘섬김 중의 첫째는 들어주는 것’이라고 했다. 하느님의 말씀을 들어서 그분을 사랑하게 되는 것처럼 형제의 말에 귀를 기울여 주는 습성을 기르는 것이 형제 사랑의 시작이라는 것이다.
"형제에게 귀를 기울이지 못하는 사람은 하느님에게도 귀를 기울이지 못한다. 그런 사람은 하느님을 향해서 지껄이기만 하지 그분의 말씀을 듣지 않을 것이라고 본회퍼는 말한다. 잘 듣는 것은 말을 귀로 들어서 머리로 보내어 이해하고 해석하는 인지과정만이 아니다. 경청은 전인격의 참여를 요구한다. ‘들음’은 한 인격체가 다른 인격체를 온갖 존경과 겸손을 다해 맞이하는 환대의 표현이다. 그래서 잘 듣는 훈련은 결국 자기 자신을 다듬는 훈련이 되지 않을 수 없다. 잘 듣기 위해선 우선 침묵할 수 있어야 한다. 관계를 끊어버리는 침묵이 아니라 빈 자리를 마련하는 침묵이다. 이런 침묵은 자기 양성의 긴 여정을 거친 결실이다. 침묵 토양 위에서만 경청·관심·주의·집중·참여·이해·공감이 가능해진다."(빛둘레, 42호 59쪽)
잘 듣는 걸 ‘경청(敬聽)’이라 한다. 잘 듣기 위해선 먼저 ‘손’을 놓아야 한다. 상대방의 눈을 바라봐 주어야 한다. 가끔 무주구천동에 사는 아저씨 댁에 가서, 방에 들어서면 제일 먼저 텔레비전 리모콘을 잡게 된다. 오랜만에 보는 텔레비전인지라 아저씨와 이야기를 나누는 동안에도 텔레비전 화면을 힐끔거리곤 한다. 특별히 관심이 가는 프로그램도 아닌데, 아저씨 얼굴과 텔레비전 사이를 오락가락하는 내 시선이 민망할 지경이다. 그러니 잡된 생각과 하던 일 멈추고 상대방에게 시선을 고정하여 그분의 말을 경청한다는 것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예전에 만났던 인천 친구는 이야기를 나눌 때마다 내 눈을 뚫어지게 바라보는 통에 나 자신이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민망해한 적이 있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그 친구만큼 상대방에게 몰두해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별로 많지 않았고, 그런 눈빛 앞에선 거짓말이나 허튼소리는 집어치워야 했을 것이다.
조성옥 수녀님은 같은 글에서, 말을 제대로 나누려면 감정이입이 되어야 한다고 하였는데 감정이입이란 ‘상대방의 신발 속에 내 발을 넣고,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을 그가 선 자리에서 그대로 느끼는 것’이란다. 이건 그 사람의 말뿐 아니라 처지까지 공감하자는 것인데, 그래야 내 잣대와 선입견을 버리고 상대방의 입장에서 그 말을 이해하게 되고, 결국 그 사람에게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그리고 내가 어떻게 행동해야 할지 깨닫게 된다는 것이다. 상대방의 마음의 바닷속에 충분히 잠겨야 한다는 뜻일 텐데, 갈 길은 멀고 내 다리가 짧음을 한탄할 따름이다.
항상 내 일이 더 급하다고 생각하며 살아왔던 것 같다. 집에 이웃이 찾아와도 손님맞이는 아내한테 맡겨두고, 내 일을 대충이라도 마무리한 뒤에 방에 들어와야 직성이 풀렸다. 이웃 사이에 그 정도는 이해하리라 혼자서 양해를 구하고 있었던 셈이다. 자신에게 항상 관대하고, 남에게 시간을 내주는 데는 야박하게 굴었던 것이다. 아이들이 찾아오면 당연히 아내가 놀아주면 될 것이고, 여자 손님이면 아내가 접대하고, 남자인 경우에는 일하면서 밖에서 이야기를 나눠도 좋다고 생각했던 것 같다.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관심없는 화제가 나오면 옆에 밀어두었던 책을 꺼내 뒤적거리고 딴청을 피운다. 그 습관을 바로 잡지 않고서야 내가 사람되긴 틀린 모양이다. 결국 다른 사람에게 주의를 집중하지 못하는 것은 자기 중심주의 때문이라는 가슴아픈 고백을 지금 늘어놓고 있는 것이다. 언제쯤 아이가 ‘옛날에 토끼가 살았는데… 아빠가 구해주셨어’하는 이야기를 두 귀로 들을 수 있을까?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