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느님은 여자이며 남자이다

여성, 신앙 그리고 미래-1

2019-10-21     참사람되어

매우 나이가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믿음으로 사라는 애기를 잉태할 수 있었다. 사라는 계약을 맺었던 분이 그 계약에 충실하실 것이라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히브리 11,11)

방랑하는 아라미아인이 나의 어머니였었지요.
에집트에서 그녀는 노예로 태어났어요.
그리고 어느날 우리 어머니들의 하느님이신 분께 부름을 받았지요.
사갈, 하갈, 레베카, 레이첼, 레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전사, 판관 그리고 창녀가 나의 어머니였어요.
하느님께서는 때때로 그녀를 쓰셨지요.
그녀는 줄 수 있는 것을 내 놓았고 기꺼이 그렇게 했지요.
라함, 야엘, 드보라, 유딧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갈릴래아 처녀가 나의 어머니였지요.
그녀는 우리의 생명과 희망을 잉태했어요.
그리고 한 칼이 그녀의 영혼에 깊이 박혔지요.
마리아, 여인 중에 복되시고 하느님의 어머니이신 분,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그리스도의 부활을 지켜 본 증인이 나의 어머니였지요.
그녀는 천사들이 말한 것을 일러주었어요.
제자들은 어처구니없는 이야기일 뿐이라고 했어요.
마리아, 막달라 여자 마리아, 요안나 등등...
우리의 기도를 들으시는 하느님,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충실한 여자 그리스도인이 나의 어머니였어요.
신비가들, 순교자, 성인들이여,
앞으로 올 모든 세대와 함께 있기를.
(알고 있는 믿음의 여인들을 호명하여 기도할 수 있다)
우리를 만드신 분,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우리를 구원하신 분,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항상 우리 모두를 지켜주시는 분, 영원히 찬미받으소서.

신앙의 조상어머니, 사라

성서 초기단계부터 아브라함은 “고향과 가족 그리고 아버지의 집을 떠나 너에게 약속한 땅으로 가거라”(창세기 12,1-2)고 하신 하느님의 요청에 충실성을 갖고 응답한 한 모형으로 우뚝 서 있다. 하느님과 뽑힌 백성간의 계약은 이처럼 아브라함의 성실성에 근거를 두고 있다. 한편 사라의 충실함에 대해서 우리는 별반 관심을 두지 않지만, 그 역시 조국과 가족, 부모의 집을 떠나도록 불리웠던 사람이다. 남편과 아내로서, 아브라함과 사라의 충실함은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었던 것이다.

히브리성서는 남자들이 지배했던 세계에서 남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남자들이 기록한 책들이다. 계약에 관계된 여자들의 체험을 재구성하기 위해서는 우리의 동화적(同化的)인 상상력이 요구된다. 다행히도 계약에 관련된 이야기들 중에는 여자들의 삶에 관하여 상상해 볼 수 있는 실마리가 있을 뿐 아니라, 그들 삶의 의미에 대해서 신학적으로 성찰할 실마리도 있다.

아브라함과 사라 이야기에서 볼 수 있는 한가지 단서는 예를 들면, 이야기 전체에 흐르고 있는 놀라운 비교적 표현들이다. 먼저, 하느님은 남성과 여성 이미지 모두를 지니고 있다. 야훼는 이미 우리들에게 익숙한 남자이름이다. 그러나 하느님은 “엘 샤다이”(El shaddai)라는 이름도 쓰고 있는데 이것은 “가슴”이라는 뜻을 지닌 단어에서 유래된 것이며, 히브리성서에 나타난 하느님의 여성 이름들 중의 하나이다. 엘 샤다이로 하느님이 표현되는 이 구절에서 하느님은 비옥함과 육체의 풍만함을 나타내는 것이다.

두번째로, 하느님은 아브라함과 사라, 혹은 원래 이름이었던 아브람과 사라이 두 사람 모두와 관계를 맺으신다. 엘 샤다이는 그들 모두에게 새로운 이름을 준다. 이때부터 아브람은 아브라함으로 사라이는 사라로 불리울 것이었다. 새 이름을 받는다는 것은 항상 하느님으로부터 특별한 계약관계로 초대된다는 것과 같다. 이 새로운 관계는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에게 해당되는 것이었다.

세번째로, 나이많은 아브라함이 사라와 자리에 함께 들어, 그렇게 늙은 사라가 임신하리라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그들 둘은 모두 웃는다. 그들의 웃음은 둘 다 하느님의 권능을 의심했다는 것을 나타낸다. 이에 엘 샤다이는 이렇게 반문한다. “야훼에게 불가능한 일이 있던가?”

미래에 대한 약속은 아브라함과 사라 모두의 상호 충실성을 요구하는 일이었으므로, 우리는 우리의 조상아버지 아브라함과 조상어머니 사라 두사람의 신앙에 대하여 분명히 이야기할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그들 신앙이 상호적이었다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왜냐하면 그들의 신앙은 매우 다르게 살아졌기 때문이다. 사라의 충실함은 그의 가슴과 마음속에서 살아졌을 뿐 아니라 신체속에서도 살아졌다. 90살이 넘은 여성이 아이를 잉태했다는 것은 무슨 의미였을까? 많은 뜻이 있겠지만, 한가지 결코 놓칠 수 없는 신학적 중요성은 사라가 하느님의 모상이었을 것이라는 사실이다. 충실함속에서 사라는 엘 샤다이처럼 되었을 것이다. 즉 양육하는 모습이다.

히브리 성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약속이 실현되기 위해서 사라의 신앙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하였다. 그러나 우리 전통의 무게는 조상아버지들의 신앙에 대하여 항상 먼저 말하고 조상어머니들의 신앙에 의하여 우리 자신들이 강해질 수 있는 가능성을 억제하고 있다. 사라는 자신의 이야기와 너무나 비슷한 엘리사벳에게 참으로 신앙의 조상어머니이며, 마리아와 모든 여성들, 미래에 대한 약속안에서 새로운 생명을 잉태하고 양육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충실성의 조상어머니인 것이다. 이 여성들은 그들의 신앙이 육체와 생명의 신비에 밀접하게 연결된 사람들이다.

 

13th-century

여성 사도들의 숨겨진 역할

여성신앙의 유산은 땅밑으로 흐르는 강과 같이, 교회 전 역사를 통하여 교회의 생명을 조용히 그리고 보이지 않게 키워왔다. 그러나 이러한 전통이 무시되었거나, 히브리 성서와 그리스도교 전통에서 대수롭지 않게 받아들여져 왔기 때문에, 믿는 이들의 공동체로서 우리 모습은 초라하기 그지없다. 교회역사는 베드로와 바오로 등 사도들의 위대한 업적에 대하여 말하지만, 그리스도교 공동체의 초기 선교적 과제들을 충실히 수행했던 여성들의 탁월한 역할에 대해선 약간의 힌트만 주고 있을 뿐이다.

오늘날 성서학자들과 역사가들은 여성들의 숨겨진 역할을 다시 발견하기 위하여 초기자료들을 연구하고 있다. 이러한 역할과 기여가 무시된 여성들은 사라의 경우만이 아니다. 여성신학자인 엘리자베스 피오렌자는 <그녀를 기억하며>라는 저서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바오로 사도가 당시 상황에서 여성들에 관하여 언급한 것을 읽노라면, 바오로 서간과 그 이후의 서간들은 여성들이 그리스도교 전파운동에서 막강한 후견인들이었을 뿐 아니라, 그들 자신의 권한을 가지고 복음전파를 열성적으로 수행했던 탁월한 지도자요 선교사였음을 알고 있었다고 인정된다. 이러한 여성들은 바오로 사도 이전에도 그리고 그와는 독립적으로도 교회일과 선교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말할 것도 없이 그들은 복음전파에서 바오로 사도와 평등했으며, 또 어떤 때는 그를 지도하기도 하였다."

이러한 확신은 처음에 우리를 놀라게 할지 모르지만, 그리스도교 역사와 우리 자신의 체험에서 발견되는 여성의 힘과 충실함을 성찰해볼 때에 이 확신이 진실이라는 것을 이해하게 된다. 남자들이 사제, 주교, 추기경 그리고 교황 등 주로 교회의 보이는 지도자들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교공동체를 지켜나가는데 있어 여성들이 지닌 신앙의 힘이 경시되어왔던 것이다. 지금까지 교회의 역사는 지나치게 남성의 교회역사로 평가되어 왔다.

그러나 여성들의 신앙은 첫번째 여성 제자들이 예수님의 주변에 모여든 이후로 풍요롭고 한결같았다. 마리아, 마르타, 막달레나, 요안나, 수산나 그리고 십자가 밑의 여성들과 부활의 정원에 있었던 여인 등. 사도행전의 여성들과 초기 선교여행의 여성들은 아피아, 리디아, 님파, 프리시카, 클로에, 훼베, 유니아, 마리아, 트리페나, 트리포사 그리고 페르시스, 유오디아, 신티크, 그밖에 수많은 여성선교사들, 여성예언자들, 여성부제들, 가정 교회의 지도자 등이 있다. 이러한 여성들은 이름도 있고 또 그리스도교 성서에서는 많은 칭송을 받아왔지만, 실제로 우리들에게는 잊혀진 이야기로 내버려져 있다.

마찬가지로, 우리는 초기 수도승들이 도시로부터 벗어나 광야에서 기도, 단식 그리고 은둔 생활을 했었다는 사실을 알고 있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여성들, 여성수도자들 그리고 여성은둔자들이 사막에서 이러한 생활을 했었음을 거의 모르고 있다. 역사를 통하여 독신공동체생활을 택했던 여성들은 사제직이나 독신공동체를 선택했던 남성들보다 그 수가 훨씬 많았다.

우리의 전통은 항상 로마에서 순교한 여성, 남성 순교자들을 찬양해왔다. 그러나 우리는 초기 연약한 그리스도교공동체를 위하여 예배장소로써 자신들의 집을 내놓은 용감한 로마여성들에 대해서는 거의 아는 바가 없다.

또한 우리의 종교사를 통하여 보면, 많은 여성들이 이 침묵의 벽을 깨뜨리기도 하였다. 즉 시에나의 가타리나, 아빌라의 데레사, 리지외의 소화데레사, 헝가리의 말가리다, 아일랜드의 브리짓드, 빙겐의 힐데가르드, 쟌다르크, 그리고 그밖에 많은 위대한 여성들이 있다. 이들은 영의 강력한 힘을 지니고 있어 어떤 보수적인 구조도 그들을 제지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우리교회의 뿌리를 풍요로운 신앙으로 채운 사람들이었다.

그러나 우리가 성녀들, 순교자들 그리고 신비가들에만 주의를 집중할 때에는 평범한 여성들이 지닌 신앙의 일상적인 특별함을 놓칠 염려가 있다. 우리 각자는 기쁨, 슬픔, 도전이 가득한 일상생활 가운데에서 여성들이 형성해가는 조용한 신앙의 역사를 지니고 있다. 이 신앙은 가정을 이끌어가고 공동체를 일치시키며 상처를 치유하고 아이들 속에서 탄생을 거듭하는 신앙이다. 이 신앙은 삶이 나누어지는 것처럼 단순하고도 공동적으로 다른 이들과 함께 나누는 신앙이다.

지금까지의 성찰이 그렇다고 교회 남성들의 신앙을 격하시키거나 거부할 의도는 전혀 없다. 그러나 지금까지 교회 안에서 너무나 당연하게 받아들여졌고 숨겨져 왔던 여성들의 신앙에 대하여 깊이 성찰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은 분명 가치있는 일이다. 그들의 신앙이 교회구조와 직분속에서 구체화되도록 인정할 때에 우리는 “유대인과 그리스인 사이에, 노예와 자유인 사이에, 남자와 여자 사이에 더 이상 아무런 차별도 없는”(갈라디아 3,28) 진실을 살게 될 것이다.

[출처] <참사람되어> 1993년 10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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