흐르는 동안에만 사랑은 사랑으로 남는다_고양이와 생쥐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12

2019-10-21     한상봉

우리집 꼬맹이가 요즘 우울하다. 여기서 꼬맹이란 우리집에서 기르는 고양이인데, 나름대로 기구한 운명 끝에 우리 부부와 인연을 맺었다. 몇 해 전에 서울 살림을 정리하고 경북 상주로 이사할 무렵이었다.

이사하기 며칠 전부터 부엌 창문에서 골목을 사이에 두고 내다보이는 앞집 지붕에 새끼 고양이 세 마리가 꼬물거리고 있었다. 아비는 본 적이 없고, 어미 고양이만이 이따금 들러서 새끼들을 보곤 하였는데, 도무지 먹이를 가져다 주는 기색이 없었다. 이 고양이들은 처마 끝까지 나와서 놀다가 간혹 아래 연탄광에 떨어지기도 했다. 창문 밖에서 낑낑거리는 소리가 들리면 어김없이 새끼 한 마리가 광에 처박혀 구원을 요청하는 것이었다. 우리는 생각나는 대로 처마 끝에 과자도 올려주고 빵도 뜯어서 올려주곤 하였다.

이사가던 날 이삿짐을 날러 주던 한 분이 한 마리 길러보면 어떻겠냐고 제안했는데, 말하자면 얼떨결에 얘를 떠맡게 된 셈이다. 세 마리 가운데 항상 구석에 박혀 먹이를 줘도 받아먹지 못하던, 우리 생각에 숫기가 없고 제 밥그릇 챙길 줄 몰라 굶어 죽기 안성맞춤인 녀석을 배드민턴 채를 넣는 주머니에 담아 상주로 함께 귀농했다. 이를테면 그 고양이는 귀농 동지인 셈이다.

그 고양이는 사람을 두려워하였다. 우유를 줘도 사람이 있는 곳에선 먹지 않는다. 먹이를 주고 문을 닫고 돌아서야 나중에 보면 밥그릇을 비웠다. 상주 모동공소에서 백일 동안 살면서, 우린 현관에 모래그릇을 하나 갖다 놓고 그 녀석의 똥오줌을 받아냈다. 헝겊인형을 주니 그놈을 입으로 물고 발로 차며 놀았고, 밤엔 아예 베고 잤다. 항상 우리 곁에 붙어 지냈고, 여전히 낯선 사람 앞에선 숨기 바빴다.

공소는 면소재지에 있었는데, 유난히 도둑고양이가 많았다. 공소 앞마당에 도둑고양이 일가족이 놀러 왔다가 어미가 새끼 고양이에게 나무 타는 법을 가르쳐 주고 갔다. 현관에서 그 모양을 본 꼬맹이도 나중에 저 혼자 그 나무에 올라가곤 했다. 꼬맹이를 데려올 때 아내는 이런 말을 했다. “아이는 아직 자신이 없어요. 고양이라도 잘 키우면 사람을 키우는 것도 자신이 붙을지 모르죠.”

새끼 고양이, 이젠 전북 무주 광대정 산골까지 따라와 두 해가 다 되도록 자란 그 꼬맹이는 우리 가족의 하나였다. 사람들은 강아지를 데려다 키우지 무슨 고양이냐고 한다. 강아지는 사람을 언제나 잘 따르지만, 고양이는 마음이 내키지 않으면 ‘주인’이 아무리 불러도 아랑곳하지 않는다. 그러나 며칠씩 집을 비웠다가 돌아오면 마을 입구에서부터 꼬맹이의 야옹 소리가 들린다.

반갑다는 소린지 밥 달라는 소린지 모르겠지만, 한 발 먼저 앞서가며 반갑다고 하는 데는 그게 강아지인지 고양이인지 헷갈릴 때도 있다. 작년 여름엔 고추밭에 따라왔다가 길을 잃고 헤매는 것을 밤중에 손전등 들고 나가서 찾아온 적도 있다. 작년까지 꼬맹이는 방에서 잤다. 그러다가 그 녀석 입장에선 문제가 생겼다.

 

지난 겨울에 우리집에 아기가 생기면서 꼬맹이는 찬밥 신세가 된 것이다. 사람들 이야기가 고양이털이 아기에게 좋지 않다는 것이다. 털이 미세해서 공중에 날아다니다가 어쩌다 아기의 입에 들어가면 목구멍이 막힐 수도 있다는 말도 나왔다. 따라서 고양이의 실내 출입은 금지당해야 했다. 그뒤로 꼬맹이의 잠자리는 작은방 뒤처마에 잇대어 내단 고방(庫房)의 시루로 옮겨졌다.

결국 그후로 고양이는 비닐벽으로 바람을 겨우 피하면서 한겨울을 지내야 했다. 물론 꼬박꼬박 밥은 주었다. 날이 풀리자, 꼬맹이는 밖에서 보내는 시간이 많아졌다. 아예 시루에 들어오지 않고 밖에서 자는 경우도 많았다. 한동안 꼬맹이를 괴롭히던 검정 도둑고양이가 사라진 뒤로는 행동반경이 더욱 넓어지고, 예전처럼 길을 잃거나 집 주변을 맴돌지 않았다. 그나마 다행이라면 다행이었다. 물론 밥때가 되면 어김없이 새로 내단 현관문 앞에서 지키고 앉아 있곤 했다.

그런데 며칠 전, 비닐로 벽을 쳤던 고방을 헐어내고 정식으로 방을 들이는 공사를 시작하면서 꼬맹이의 태도가 변했다. 시루를 들어내고 비닐을 뜯어내자, 꼬맹이는 충격을 받았던 모양이다. 고양이는 우울해졌다. 잘 울지도 않고 불러도 대답 없고 가까이 가도 곁을 주지 않았다. 밥을 주어도 전처럼 달려들지 않고, 우리가 물러나고 나서야 밥을 먹었다.

사실 지난 두어 달 동안은 농사일도 바쁘고, 집도 고치고 하는 과정에서 고양이 밥을 제대로 챙겨주지 못했다. 우리집에선 아기가 항상 앞전이고 고양이는 뒷전이기 마련이었다. 도무지 쥐를 잡지 않던 꼬맹이가 들쥐 사냥에 나선 것도 이 무렵부터였다. 물론 쥐 잡는 솜씨가 뛰어난 것 같지는 않았다. 항상 아랫배가 오목했던 걸 기억한다. 이런저런 서운함이 겹친 것 같다. 꼬맹이가 급작스럽게 태도 변화를 일으킨 뒤에야 우린 고양이 밥을 제대로 챙겨주기 위해 애쓰기 시작했다. 미안하다, 꼬맹아, 하고.

그 참에 소설가 박경리 선생이 어디선가 썼던 글이 떠올랐다. 고양이에 대한 것이었는데, 아마 집근처에 도둑고양이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음식찌꺼기를 헤집어 먹던 고양이를 보고 불쌍한 마음이 생겼는지 박경리 선생은 언제부턴가 도둑고양이 몫의 밥을 챙겨주었던 모양이다. 그후론 온 동네 도둑고양이들에게 소문이 퍼졌는지 밥때가 되면 고양이들이 그 집 마당에 떼지어 오고, 물론 박경리 선생은 이 녀석들에게도 음식을 덜어주었다.

박경리 선생은 어떻게 그런 마음을 냈던 것일까? 우리집 고양이인데도, 귀농 동지라고 가족이라고까지 부르던 고양이의 밥을 귀찮아서 주지 않을 때도 많은데, 도둑고양이도 소중한 목숨이라고 보살피는 그 영혼은 얼마나 특별한가. 하긴 아동작가 권정생 선생 같은 분은 생쥐들과 한 이불 덮고 잠을 잔다고 하니 그 마음의 깊이와 높이를 헤아리기란 참으로 어렵다.

예전에 안동에 갔다가 어느 신부님을 통해 들은 이야기인데, 권정생 선생이 하도 몸이 아파서 힘들어하니, 병원에 입원시킨 적이 있다고 한다. 그런데 며칠 못 견디고 퇴원했다. 도대체 왜 그러냐고 답답한 심경을 드러내자 권정생 선생이 하는 말씀, “자꾸 약을 먹으라잖아. 내 몸도 몸이라고 들어앉아 먹고사는 목숨인데, 약을 쳐서 병균을 죽일 수는 없지. 그 대신 밥 잘 먹으면 돼. 그래야 나도 살고 병균도 먹을 게 아니겠어.” 아무리 아파도 하늘 모시듯 병균 모시며 밥을 잘 드시는 탓인지, 이른바 사형선고 받은 지 오래지만 여전히 권정생 선생은 밥 잘 먹고 생쥐들과 교회당 지키며 아이들에게 좋은 동화를 쓰고 계신다.

사람 생명뿐 아니라 모든 생명이란 생명이 그렇게 다 오묘한 것인가? 아기가 생기면서 끔찍이 사랑할 만한 사랑이 하나 더 늘어났다. 그만큼 내 사랑의 반경이 넓어졌다. 그 사랑이 이기적인 사랑이 되지 않으려면, 사랑은 계속 확장되어야 한다. 아무리 많은 것들을 사랑한다고 하더라도, 거기서 멈추는 순간 그 모든 사랑이 이기적인 사랑으로 형질(形質)변화를 일으키는 법이다.

내 사랑이 가족에만 머무를 때 가족(이기)주의에 빠지게 되고, 연고지에 머물 때 지역(이기)주의로 흐르고, 제 나라 백성에게만 머물 때 국가(이기)주의에 갇히고, 지구란 행성에 머물 때 끝점도 없이 넓게 펼쳐진 우주심을 잃어버린다. 참사랑은 물같이 흐르고, 불같이 타오르고, 햇살처럼 뻗어가며, 빗물처럼 스미고 바람처럼 막힌 곳을 열어제치는 것이다. 흐르는 동안에만, 뻗어가는 동안에만, 커지는 동안에만 사랑은 사랑으로 남는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