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군가의 그리운 신발 끄는 소리
한상봉의 내 돌아갈 그립고 아름다운 별-6
지난 한 달 동안은 눈속에 파묻혀 지냈다. 요 며칠 봄날같이 반가운 햇살이 비치는가 했더니 이른 봄비가 한번 긋고 지나간 뒤에 다시 눈이다. 흰눈은 햇살만큼 따뜻하고 오히려 맑아서 기분을 좋게 한다. 물론 이건 기분상의 문제지만, 겨울이면 밥 먹듯이 추위를 걱정해야 하는 게 가난한 산촌의 풍경이고 보면 애써 이런 생각을 도모해 보는 것 또한 우리의 지혜다. 언젠가 한 선배가 “산다는 것은 견디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그러나 단순히 견딘다는 심경으론 세상을 살아낼 재간이 없다. 죽어버리거나 자포자기로 삶을 팽개쳐 두게 된다.
가끔 서울에 들러 서울역 앞을 서성거리다 보면 언제나 마주치는 궁색한 표정들이 있다. 이들을 행려자라 해야 할지 노숙자라 불러야 할지 모르겠다. 요즘은 멀쩡하게 직장생활하며 가족을 보살피던 든든한 가장이 하루아침에 거리로 내몰려 다정했던 얼굴들과 연락을 끊고 안간힘으로 세상을 견디는 경우를 쉽게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잘 나가는 사람들이 쾌재를 부르더라도 이 사람들의 심중엔 ‘말세’에 대한 감정이 사라지지 않는다. 올해 겨울 유난히 눈이 내리는 것은 이 고단한 인생들을 위로하기 위함은 아닐까? 이들이 울분을 삭일 때까지 쌓이고 쌓이는 눈발이 임시방편이긴 해도 어찌하랴, 현실은 끄덕하지 않는데.
이 절망의 끝에서 여느 해처럼 올해도 무심히 사순절이 시작되고, 또 부활절을 맞을 것이다. 2천 년 전 동방의 맨 서쪽 언저리 작은 마을 나자렛 출신의 한 청년이 억울하게 비명 속에 죽어갔음을 기억하고, 또한 그게 끝이 아니라 새로운 생명의 시작임을 경축하는 것이다. 사람의 마음이야 사순절이 서둘러 지나가고 부활절이 오래 계속되었으면 하고 바랄 수 있다. 고난과 죽음의 시절을 달가워할 영혼이 어디 있겠느냐마는, 그 고난이 혼자 겪는 아픔이 아니라는 점을 알아야 한다. 또한 내 육신과 영혼이 지금 평안하다면, 다른 사람이 내 받을 고통을 대신 앓고 있다는 고통의 연대성을 기억해야 한다.
이 고통의 바닥에는 그릇된 세상의 질서가 있다. 더 분명한 어조로 말하면, 부와 권력에 집착하는 완고한 마음들과 그 세력이 만들어 놓은 불행의 늪을 확인해야 한다. 그 늪에서 무력한 사람들과 함께 단련받으면서, 이 부당한 현실을 역전시킬 어떤 희망을 나누어야 한다. 그 절망과 희망의 한가운데서 죽어가던 젊은이 예수가 아주 남루한 형상이었다는 것은 우리의 희망을 더욱 증폭시킨다. 별볼일없는 인생이 세상을 구원한다는 실낱 같은 믿음을 더해주는 까닭이다. 비천한 이들이 세상을 거룩하게 뒤바꾸리라는 것은 현실적으로 가능해 보이지 않기에 더욱 종교적이다. 그리스도교의 신앙은 이런 역설에서 탄생한 것이다.
곽재구 시인은 허름한 까닭에 오히려 장엄한 천불천탑(千佛千塔) 미륵불로 유명한 화순 운주사에서 ‘첫눈’이란 시를 지었다.
"한 세상이 어두워지고 있네
마실 물과 먹을 빵을 걱정 속으로
마을들이 싸리꽃처럼 꽃불을 틔우고 있네
인간의 사랑이 팔만사천 년 지속된다는
빈 땅의 이름들이 바람에 서걱거렸네
지평 낮게 깔리는 소 울음소리여
한 해 동안 낡은 신발 속에 감추어진
언 발가락들의 꿈을 헤아려 보았는가
고통에 전 육신들이 공중들림을 위해
아우성치는 소리 들었는가
녹슨 밥숟갈, 헌 이부자리 등짐 메고
이리저리 떠도는 생불들의 기침소리
팔만사천 년 더 기다려 온
누군가의 그리운 신발 끄는 소리"
밭은 기침으로 목이 헌 사람들은 장차 온전한 새로움으로 세상을 뒤바꿔 주리라는 미륵(彌勒)을 기다렸다. 그 간절함으로 돌을 깨어 미륵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이들의 염원이 하도 간절한 까닭에 억지로라도 도솔천에서 세상으로 하생(下生)하여야 하지 않을까? 불우하게 죽은 예수처럼 요절했던 미륵이 장차 불행한 중생들을 구하러 온다는 믿음은 우리의 현실이 각박할수록 실감할 수 있다. 오죽 사는 게 갑갑하고 억울하고 피곤했으면 오매불망 미륵불, 미래불(未來佛)을 기다리는가. 여익구가 쓴 <미륵경의 세계>라는 책에선 미륵이 몰고 올 용화세계를 이렇게 표현한다.
"그 나라의 땅이 기름지고 풍족하여 많은 사람과 높은 문리로 거리가 번성할 것이다. …대지가 평탄하고 거울처럼 맑고 깨끗하며, 곡식이 풍족하여 갖가지 보배가 수없이 많으며, 마을과 마을의 닭이 우는 소리가 서로 접하여 있느니라. 이때에 아름답지 아니한 꽃이며 과실나무는 말라서 없어지고 추하고 악한것이 또한 스스로 소멸할 것이다. 기후가 화창하고 적당하여 사시의 계절이 순조로움으로 사람의 몸에 여러 가지 질병이 없으며, 탐하는 마음과 성내는 마음, 어리석은 마음이 커지지 아니하고 은근하여서 사람이 평등하여 모두 한가지 뜻으로 서로를 보게 되어 기쁘고 즐거워하며 착한 말로 서로 오가는 뜻이 똑같아서 차별함이 없느니라."
이런 희망사항이 어찌 불교에 한정되겠는가. 요한묵시록에선 다시 오겠다던 그 주님이 오시면, 새 하늘과 새 땅이 열릴 것이라고 한다. “하느님은 사람들과 함께 계시고 사람들은 하느님의 백성이 될 것이다. 하느님께서는 친히 그들과 함께 계시고 그들의 하느님이 되셔서 그들의 눈에서 모든 눈물을 씻어주실 것이다. 이제는 죽음이 없고 슬픔도 울부짖음도 고통도 없을 것이다. 이전 것들이 다 사라져 버렸기 때문이다.”(21,3-4)
결국 세상의 구원은 가난하고 남루한 얼굴들에게 달려 있는 게 아닐까? 그들이 안타깝게 호소하는 기운이 하늘에 전달될 때, 미륵불의 세계이든 하느님 나라이든 올 것은 오고야 말 것이다.
어쩌면 그 나라가 예수의 참말(진언)처럼 이미 우리 안에 당도해 있는지도 모른다. 올바르고 거룩한 삶을 뒤바꾸지 않고 일관되게 살아내는 사람들의 뒷모습에서 우린 하느님 나라의 그늘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 그늘 아래서 쉬고 싶은 사람들만이, 그 그늘 아래서만 안심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그런 사람들 안에서 ‘지금 여기’ 성취되고 있는 하느님 나라를 발견할 것이다.
우리도 그들처럼 올바르고 거룩한 편에 서 있는가? 아님 다른 편을 고집하여 내 한 몸 편하자고 세상에 고통을 더해주고 있는가? 성서는 말한다. “그때가 가까웠으니 이 책에 기록된 예언의 말씀을 봉하지 말아라. 불의를 행하는 자는 불의를 행하도록 내버려두고 더러운 자는 그냥 더러운 채로 내버려두어라. 올바른 사람은 그대로 올바른 일을 하게 하고 거룩한 사람은 그대로 거룩한 사람이 되게 하여라. …자, 내가 곧 가겠다. 나는 너희 각 사람에게 자기 행적대로 갚아주기 위해서 상을 가지고 가겠다.”(묵시 22,10-12)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