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성숙한 사제, 있으나마나한 신앙

[한상봉 칼럼] 본당 사목현장에서 신자가 생각하는 몇가지

2019-07-23     한상봉 편집장

“교회개혁, 그게 되겠어?”

나는 교회의 사목현장에서 발생하는 문제들에 대한 해답을 갖고 있지 않다. 다만 내가 만난 사목자와 신자들 사이에 튀어나오는 감정의 소용돌이를 때로 진하게 때로 어지럽게 경험했을 뿐이다. 내가 경험한 세계 안에서 말한다면, 신자들이 결국 내뱉는 마지막 말은 “그게 되겠어?”였다.

신자들도 교회 안에서 애정을 갖고 신앙생활을 하면서 잔뼈가 굵어지는 만큼 교회에 대한 견해와 비전을 나름대로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녀를 양육하고 사회생활을 하면서 경험한 소신과 교회에서 가르치는 비전 사이에서 방황하고 있다. 그들은 대부분 “교회는 세상과 달라야 해!”라고 생각하지만, 현실 속에선 똑같은 것을 경험하고 있기 때문에, 신앙적 확신이 깊은 만큼 교회 안에서 느끼는 절망도 크다. 교회와 세상은 운영방식에서 크게 다르지 않기 때문이다. “세상 속에서 세상과 다르게” 처신해야 하는 교회가 선교적 사명을 다하기 위해 마주치는 문제는 무엇일까?

 

사진=한상봉

 

본당에서 갑질이 문제다

교회는 “하느님 백성들의 평등한 공동체”이다. 상근자와 비상근자처럼, 성직자와 수도자, 평신도들은 직무상 차이는 있겠지만, 예수님을 추종하며 하느님 나라를 위해 헌신하도록 부르심을 받은 평등한 지체들이다. 제2차 바티칸공의회에서 어떤 입장을 취했든 간에, 사회 안에서 민주주의를 이미 충분히 경험한 평신도들은, 교회 안에서도 동등한 발언권과 참여를 기대한다. 합리적 논의와 공동합의, 그리고 일관된 사목실천을 바란다.

이를 위해 마련된 교회구조가 ‘본당 사목평의회’인데, 본당에서 발생하는 가장 큰 파급력을 일으키는 사건은 주로 ‘본당 사제와 사목회장 사이’에서 갈등이 발생할 때다. 평의회 의장은 본당사제이지만, 사목회장은 자신이 본당신자들을 대표하는 직분으로 여기기 때문에, 은근히 본당 사제와 맞서는 경우가 있다.

서로 정치적 견해가 다르거나, 종교적 취향이 다르거나, 그래서 심정적으로 그다지 서로 좋아하지 않거나, 논의과정과 결정과정에서 사제의 일방적인 독주가 나타날 때 긴장은 최고조에 달한다. 물론 게임은 본당사목의 최종 결정권을 지니고 있으며, 이른바 ‘공식적인 교회의 사람’으로 분류되는 본당사제의 판정승으로 대부분 끝나고, 사목회장과 그를 둘러싼 사목위원들은 기운이 꺾인 채 흩어지게 된다. 그리고 이런 경험이 거듭될수록 평신도들은 ‘성직자들의 갑질’에 분개하기 마련이다.

교종 요한 23세에게서 잘 드러나듯이, 좋은 교황이란 ‘외교적 수완’을 갖추어야 한다. 사목적 목표를 놓치지 않으면서, 일종의 타협의 기술을 익혀야 한다. 프란치스코 교종은 심지어 “외교는 타협의 예술”이라고 말한 바 있다. 요한 23세 교종이 공의회를 소집했을 때, 교황청은 이미 옥타비아니 추기경 등 보수세력이 득세하고 있었고, 그들의 공의회 반대의견을 무마시키기 위해 교종은 옥타비아니 추기경 등 보수세력에게 공의회 초안을 마련하게 하고, 정작 공의회 현장에선 진보적인 다른 주교들의 입을 통해 초안을 폐기시키고 새로운 초안을 마련하는 방식으로 교회개혁의 물꼬를 열어놓았다.

마찬가지로 본당 사제들도 ‘외교적’ 태도가 필요하다. 그러나, 사제들의 외교술은 그다지 높은 수준의 치밀함을 요구하지는 않는다. 단 한 가지만 확보되면 나머지는 자동으로 해결되지 않을까, 생각한다. “겸손함”이다. 당장의 성과를 접고, 긴 안목에서 겸손한 태도를 유지할 수 있다면, 그곳에서 사제와 평신도 사이에 ‘우정’이 발생하고, 그 우정이 교회에 활력을 제공한다. 내 경험에 제한해서 본다면, 좋은 사제 곁에서 늘 좋은 평신도가 있었다. 굳이 ‘동반사목’이라는 표현을 쓰지 않더라도 사제, 수도자, 평신도 사이에 ‘환대와 우정’이 머물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럴 때 이런 사람들 사이에 갑질조차 허물없는 관계로 발전한다.

본당은 신자들의 열정을 소진시킨다

‘열정페이’라는 말이 가장 많이, 그러면서 거부감 없이 요구되는 현장이 본당이다. 본당 신자들의 숫자가 증감하는 것과 무관하게, 신자 노령화도 문제지만, 개인의 삶을 먼저 돌보려는 이들이 늘어나면서 주일/평일미사에 참례하는 것 말고는 특별한 본당 활동(단체나 구역반)에 참여하기를 꺼리는 신자들이 많다. 그래서 대부분 본당은 언제나 인력난에 허덕이고 있다. 결국 일부 신자들에게 과중한 활동이 쏟아져 내리고, 이런 신자들은 에너지가 고갈될 때까지 활동하다가, 급기야 자신의 신앙생활에 대한 회의마저 느낀다. 신앙 때문에 시작한 일이 자기 신앙을 돌볼 시간을 빼앗기 때문이다.

또한 본당활동은 단순히 돈과 시간과 에너지를 나누는 것뿐 아니라, 불특정 다수 신자들과의 관계가 많아진다는 의미이기 때문에 인간관계에서 좌절감을 맛보면서, 본당생활 자체에 염증을 일으키기도 한다.

그럼 해결책이 있나? 해야 될 일은 많은데 사람이 부족하니. 방법은 인력에 맞추어 일을 조절하는 방법뿐이다. 본당사목에서 더 중요한 일과 덜 중요한 일을 나누고, 더 중요한 일에 집중하면서 본당활동의 덩치를 줄여야 한다. 교회는 본당을 유지하기 위해 존재하지 않는다. 그러니, 기존에 해 오던 관성 대로 모든 것을 감당할 필요는 없다. 이럴 때, 사목자는 한 가지만 생각하면 좋겠다. 어떻게 해야 우리 본당 신자들 다수가 행복해 할까? 어떻게 해야 우리 본당 신자들이 복음을 더 잘 알아듣고 생활 속에서 살아갈 수 있을까?

 

사진=한상봉

 

본당에서 신자들이 가장 원하는 것은 ‘좋은 강론’이다

신자들이 본당과 사제들에게 원하는 것은 말할 수 없이 많겠지만, 가장 도드라진 것은 ‘강론’이다. 신자들은 세례 이후 제대로 된 신앙교육을 받지 못한 채 전례와 기도생활에 집중해 왔다. 가톨릭을 보통 ‘경청하는 종교’라고 말한다. 신앙인들은 먼저 ‘듣고’ 행동한다. 신자들이 하느님의 뜻을 헤아리고 예수님처럼 살기 위해 직접적으로 도움 받고, 상설적 교육을 받을 수 있는 기회는 사실 ‘강론’뿐이다.

그러나 일부 사제들의 강론이 너무 부실하다. 강론이 언제나 “착하게 살자”로 끝나는 예화와 덕담, 훈계로 이어질 때, 우리 신자들은 그런 이야기를 굳이 성당까지 와서 들을 필요가 없다. 유튜브에 들어가면 대단한 명사들이 온갖 재밌고 요긴한 이야기를 다 해 준다. 문화생활도 따로 필요 없을 정도다.

그런데도 신자들이 성당에 와서 강론을 듣는 이유는 “그렇다면, 교회 입장은?” “그렇다면, 예수님의 생각은?” “그렇다면, 하느님은 무엇을 원하실까?” 등이다. 가톨릭교회가 가르치는 고유한 길이 무엇인지, 그리스도교 신앙이 세상과 인간에게 말하고 싶은 것이 무엇인지 ‘색다른’ 이야기를 듣고 싶은 것이다. 몇 마디 위로와 농담으로 강론을 물들이지 않았으면 한다.

신자들과 엇비슷한 수준에서 복음해설을 해서도 안 된다. 복잡한 세상에서 사람들은 고민도 많고, 그만큼 새로운 신학적 견해도 나오고 있다. 사제들은 ‘좋은 강론’을 위해 사실 더 많이 공부하고, 현대인의 요청에 응답하는 신학적 견해들을 흡수하고, 이걸 쉽게 풀어서 신자들의 언어로 말할 줄 알아야 한다. 사제는 본래 주교의 교도권을 대행하는 사람들이다. 그렇다면, 신자들을 훈계가 아니라 ‘가르치는’ 영적 교사 역할을 해야 한다. 이참에 사제들에게 파커 파머의 <가르칠 수 있는 용기>(한문화, 2005)라는 책을 권하고 싶다.

본당 교육 다시 생각해야 한다

본당 차원에서 하는 교육 프로그램은 아주 단순하다. 사순절 특강과 대림절 특강. 끝이다. 교회가 세상을 위한 구원의 보편적 성사이며, 교회의 사명이 프란치스코 교종께서 강조하시는 것처럼 ‘선교’라면, 본당은 이런 선교사들을 양성하는 못자리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본당은 그저 신자들이 모여 있는 곳 이상이 아니다. 그 안에서 다양한 사람들이 서로 다른 신앙의식을 지니고 만나면서 지지고 볶는다. 이게 싫으면 살짝 미사 참례만 하고 ‘평온하게’ ‘탈없이’ 지낸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삶의 목적이 지옥을 면하는데 있지 않다”고 하신 교부들의 가르침을 무색하게 만든다.

그러니, 본당 교육은 그게 대림절 특강이든, 사순절 특강이든 상관없이 여러 가지 방법으로 신자들이 “내가 정말 그리스도인인가?”라고 질문하고 성찰하게 만드는 것이어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교리’를 넘어서 다른 공식적인 가르침이 많지만, 이를 습득하고 알려는 신자들은 거의 없다. 사회교리도 극히 일부 신자들의 관심거리일 뿐이다.

내 생각에 세상과 교회 사이에서 가톨릭신자들에게 가장 적절한 지침이 될 수 있는 문헌은 프란치스코 교종의 권고 <복음의 기쁨>이다. 적어도 이 문헌 만큼은 사제든 수도자든 평신도든 성경만큼 자주 읽고 고민하고 성찰하면서 습득하면 좋겠다. 우리 교회와 신앙의 영적 결핍이 어디에서 시작되었으며, 집중해야 할 선교적 초점이 무엇이고, 어떻게 신앙인으로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할지 잘 전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묵주기도 백만 단이 중요한 게 아니라, 신자들이 배운대로 믿는대로 사는지, 정말 그렇게 살 수 있는지 가늠하는 것이다. 그 과정에서 사제들의 격려와 지지가 필요하다. 그래서 신앙에도 ‘훈련’이 필요하다고 키르케고르가 말한 것이다. 사랑은 사랑하면서만 배운다고 한다.

방법적으로도 일방적으로 듣는 ‘강의’ 스타일뿐 아니라, 요즘 한국교회에서 실종된 ‘피정’이나 교리경시대회 등을 다시 복원할 필요가 있다. 또한 신심/활동단체뿐 아니라 토론이나 강독모임 같은 것이 본당에 많이 생기면 좋겠다. 교육 관련해서 성서모임이 잘 되고 있다고는 하나, 성경의 배경지식을 공부하는 모임일 뿐, 어떻게 성경에서 말하는 대로 살지 고민하는 모임은 전무한 게 가톨릭교회의 현실이다.

예를 들면, 제 신앙을 현장생활에서 살펴보고 실천하는 가톨릭노동청년회(JOC) 투사교육 같은 시스템이 교회 안에 다시 도입되어야 한다. “성당에만 잘 나오면 되는 거지” “주일미사만 잘 나와도 좋겠어” 하는 식의 교회 운영은 그 아까운 돈과 사람과 시간을 소비하는 것이다. 이럴 때 사람들은 “성당은 뭐 하러 있는 거지?” 하고 다시 묻게 된다.

 

사진=한상봉

 

다시 생각해 보는 ‘성직자 권위주의’ 

여러 경로를 통해 교회개혁 과제를 거론하는 데 언제나 빠짐없이 등장하는 항목이 성직자 권위주의다. 프란치스코 교종 역시 성직자들이 권력화 되거나 관료화 되는 걸 경계하는 발언을 자주 하신다. 사실 많은 사제들이 ‘공무원화’ 된 것은 사실이다.

공무원의 특징은 ‘보장된 밥그릇’에서 비롯된다. 개신교 목사는 물론 한국 성공회 사제만 해도 ‘교회 안에서 벌어먹기 위하여’ 고군분투한다. 하지만 가톨릭 사제들은 미사 등 전례 행위에 하자가 없다면 장상이 그 사제의 밥그릇을 마구 건드리는 법이 없다. 그리고 사제라는 ‘보장된 완장’을 차고 다니며, 뒤에서 신자들이 뭐라 하든, 교회 분위기상 위세를 부리기에 적절한 곳이 교회다.

사제들이 성사권을 쥐고 있기 때문에, 소박한 신자들은 ‘구원의 당락’을 결정하는 권위 앞에서 때로 몸이 오그라들곤 한다. 그래서 맘에 드는 사제를 만나면 안심하고, 맘에 들지 않는 사제를 만나면 피하는 게 상책이라고 생각한다. 이런 상황은 교회가 지닌 큰 불행이다.

그러나 이를 두고 ‘성직자 권위주의’라고 싸잡아 비판할 생각은 없다. 그동안 내가 만나보았던 사제들을 떠올린다면, 그것은 ‘성직자 권위주의’가 아니라 그 사제의 ‘인간적 결함’에서 비롯된 경우가 많다. 물론 교회가 ‘봉건적’ 권위주의 구조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분명한 사실이지만, 현재 사목현장에서 일하는 문제 사제들에게서 발견하는 것은 ‘권위 없는 인간적 결함’일뿐이다.

어느 사회든 권위는 필요하다. 그리고 ‘평균적으로’ 일반 신자들보다는 사제들이 더 심성이 곱고 영적 지향이 복음적인 것은 사실이다. 기본적으로 선하고, 늘 복음을 접하기 때문에 자기 성찰의 기회도 많기 때문일 것이다. 이런 사제들이 교회 안에서 권위를 갖고 발언할 수 있는 것은 그나마 다행한 일이다.

정작 다른 문제는 권위적 신자층이 성직자 권위주의의 그늘 뒤에 숨어서 암약하는 일이다. 신자가 다 같은 신자가 아니다. 신자층이 경제적-정치적-사회적으로 상향조정되면서 본당에서 위세 부리고 싶어하는 신자도 꽤 있다. 이들은 자신과 견해가 다른 사제를 몰아치기 위해 앞에서든 뒤에서든 ‘성직자들의 독재’를 규탄한다. (굳이 대한민국수호천주교인모임의 엘리트 평신도들에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다.)

최근에 나는 “교회문제는 구조보다 사제들의 인간적 미성숙”이라는 데 방점을 두고 있다. 그 미성숙한 부분을 보충하기 위해 교도권이 숙고해야 할 부분이 많을 것이다. 또한 신자들의 미성숙한 신앙을 돌보려는 노력 또한 병행되어야 한다. 사제를 포함한 교회 관리자들은 언제나 “맹목적이고 순진하며 우매한 신자가 다루기 더 편하다”는 유혹에 빠질 위험이 많다. 이 길은 함께 망하는 길이다.

나는 교회의 모든 지체들이 자매형제적 사랑 안에서 일치하기를 희망한다. 그리고 그 일치의 바탕에 ‘다만 가난한 이들에게 먼저 선포된 복음’이 자리잡기를 바란다.
 

*이 글은 지난 5월 29일 민족화해센터에서 열린 의정부교구 통합사목연구소 사제 포커스그룹 연수 때 발제한 내용입니다.  

 

한상봉 이시도로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
<가톨릭일꾼> 편집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