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와 제자들이 벌인 유랑, 무소유, 무가족 운동
바리사이와 적대한 뒤, 갈릴래아 촌락 ‘밖’에서―떠돌이 예언자들-3
떠돌이 예언자들, 활동 양식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마르 3,14-15)
여기서 ‘말씀 전파’와 ‘축귀’, 이 두 가지가 예수운동의 활동을 전형적으로 보여준다. 이 두 요소에 대하여는 다른 강의에서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지만 간단히 말하면 ‘말씀 전파’란 하느님나라가 도래했다는 것, 그것이 의미하는 것에 관한 메시지를 말하고, ‘축귀’란 악령 들린 이를 치유라는 행위다. 이것은 위에서 설명한 것처럼 바리사이적 안식일법의 밖으로 내몰린 병자의 치유라는 점에서 바리사이적 질서와 대립하고 있다.
‘사도’와 ‘제자’
‘제자’(μαθητης)라는 단어는 초기 그리스도 운동 당시에도 이미 널리 사용되었지만 그리스도파 공동체의 직위로 제도화된 용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오히려 같은 함의를 갖는 단어지만 제도화의 흔적을 더 두드러지게 드러내는 것은 ‘사도’(αποστολος)라는 용어다. ‘제자’는 네 복음서에 꽤 많이 등장하지만, 그 외에는 〈사도행전〉에서만 나온다. 반면 ‘사도’는 네 복음서 중에는 〈루카복음〉에만 집중 등장하고, 그 외에 〈사도행전〉과 바울의 친서들과 위서를 포함한 대부분의 문서들에서 나온다.
그분께서는 열둘을 세우시고 그들을 사도라 이름하셨다. 그들을 당신과 함께 지내게 하시고, 그들을 파견하시어 복음을 선포하게 하시며, 마귀들을 쫓아내는 권한을 가지게 하시려는 것이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 열둘을 세우셨는데, 그들은 베드로라는 이름을 붙여 주신 시몬 ... 또 예수님을 팔아넘긴 유다 이스카리옷이다.(마르 3,14-19)
"...그러므로 주 예수님께서 우리와 함께 지내시는 동안 줄곧 우리와 동행한 이들 가운데에서, 곧 요한이 세례를 주던 때부터 시작하여 예수님께서 우리를 떠나 승천하신 날까지 그렇게 한 이들 가운데에서 한 사람이 우리와 함께 예수님 부활의 증인이 되어야 합니다.” 그래서 그들은 바르사빠스라고도 하고 유스투스라는 별명도 지닌 요셉과 마티아 두 사람을 앞에 세우고, 이렇게 기도하였다. “모든 사람의 마음을 아시는 주님, 이 둘 가운데에서 주님께서 뽑으신 한 사람을 가리키시어, 유다가 제 갈 곳으로 가려고 내버린 이 직무, 곧 사도직의 자리를 넘겨받게 해 주십시오.” 그러고 나서 그들에게 제비를 뽑게 하니 마티아가 뽑혀, 그가 열한 사도와 함께 사도가 되었다.(사도 1,21-26)
위 구절은 〈마르코복음〉에서 ‘사도’가 사용된 두 구절 중의 하나인데, 여기서도 이 단어는 오래된 사본에는 나오지 않는다. 아무튼 제자단의 숫자를 제한하는 문맥에서 사도가 등장한다는 것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위에서 보듯 〈사도행전〉도 가룟 유다의 사망 이후 결원을 보충하는 문맥에서 ‘사도’라는 용어가 사용되고 있다.
바울이 스스로를 자칭 ‘사도’라고 부르면서, 사람들이 지명한 ‘사도’와는 달리, 자신은 하느님이 ‘사도’로 임명했음을 강조한 것도 ‘사도’의 명단이 제한되어 있는 상황을 전제로 한다. 이는 ‘사도’가 일찍부터 상징적인 직위로 통용되고 있었음을 시사한다.
사람들에게서도 또 어떤 사람을 통해서도 파견된 것이 아니라, 예수 그리스도와 그분을 죽은 이들 가운데에서 일으키신 하느님 아버지를 통해서 파견된 사도인 나 바오로가, 그리고 나와 함께 있는 모든 형제가 갈라티아의 여러 교회에 인사합니다.(갈라 1,1-2)
다시 ‘제자’라는 단어에 관해 더 이야기해보자. 서기 50년대의 문서들인 바울의 서신에 이 단어가 전혀 등장하지 않는다는 것은 초기 지중해 지역의 그리스도파 운동에서 이 용어는 알려져 있지 않았음을 시사한다.
여기서 참고로 바울의 활동 시기와 공간에 대해 이야기하자면, 그는 36/37년경 다마스쿠스에서 등장해서 40년대 말까지 아라비아 지역의 그리스도파 활동가였고, 40년대 말부터 60년대 초까지 안티오키아에서 시작하여 지중해 지역으로 확산된 그리스도파 운동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알다시피 그의 친서로 알려진 서신들 7개는 지중해 지역에서 활동할 때 쓴 것들이고, 아라비아에서 활동할 당시의 문서는 알려져 있지 않다.
그런데 바울은, 위에서 말한 것처럼, 확정된 사도 명단에 자신을 추가하고 싶어 했다. 그리하여 그는 서신들에서 자신이 ‘이방인을 위한 사도’라는 새로운 개념을 쓰곤 했다. 그렇다면 숫자의 제한이 강하지 않은 ‘제자’ 개념을 알았다면 사용했을 가능성이 농후하다. 요컨대 그는 ‘제자’라는 단어를 몰랐을 가능성이 크다.
아마도 다마스쿠스와 안티오키아를 거점으로 하여 동서로 확산된 그리스도파 운동에 ‘사도’라는 용어를 소개한 것은 예루살렘의 예수공동체와 이들 그리스도파 공동체 사이의 가교 역할을 했던 누군가에 의해서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바울에 의하면 바울 당시 일반적으로 공인되던 사도의 대표적 인물을 베드로, 요한, 주의 형제 야고보임을 말하고 있다.(〈갈라디아서〉 2,9; 참조. 1,17) 아마도 예루살렘 예수파와 그리스도파 사이에서 잘 알려진 인사인 바르나바 같은 이가 ‘제자’, 곧 그리스어로 번역된 ‘마쎄테스’를 쓴 최초의 사람 중의 하나가 아닐까 하는 조심스런 추정을 해본다.
하지만 이 단어는 지중해 지역을 배경으로 하는 후대의 문서들인 〈루카복음〉과 〈사도행전〉 그리고 〈요한복음〉에서 상당히 많이 사용된다. 즉 바울 이후에 이 단어는 ‘사도’만큼이나 유명한 단어가 되었다. 아마도 그 출발점에는, 예루살렘의 예수파와는 다른 계보의 예수운동을 반영하는 〈마가복음〉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팔레스티나 북부와 시리아 남부 지역의 오클로스들의 예수전승에서 비롯된 구술문학인 〈마르코복음〉이 채록된 시기는 대략 70년 어간으로 추정되니, 그 이후부터 1세기 말 사이에 이 구술문학집이 지중해 지역에도 알려지면서 예수의 추종자를 가리키는 ‘사도’라는 용어와 같은 대상을 지칭하는 용어로 ‘제자’가 사용된 것으로 추정된다. 그렇다면 이 텍스트에서 ‘제자’는 어떤 의미로 사용되었을까.
그러자 그들(베드로와 안드레아)은 곧바로 그물을 버리고 예수님을 따랐다.(마르 1,18))
곧바로 그들(요한과 야고보)을 부르셨다. 그러자 그들은 아버지 제베대오를 삯꾼들과 함께 배에 버려두고 그분을 따라나섰다.(1,20)
그 뒤에 길을 지나가시다가 세관에 앉아 있는 알패오의 아들 레위를 보시고 말씀하셨다. “나를 따라라.” 그러자 레위는 일어나 그분을 따랐다.(2,14)
〈마르코복음〉에서 제자로 부름받은 이들의 행위를 묘사하는 특징적 구절들이다. 그들 행위의 공통된 특징은 ‘버리고 따르다.’는 것이다. 제자의 이와 같은 ‘따름’을 가리키는 그리스 단어는 대부분 동사 ‘아콜루떼오’(ακολουθεω)를 번역한 것이다. 물론 제자의 따름을 묘사할 때 다른 단어가 사용된 경우도 있고(1,20: “그들(요한과 야고보)은 ...... 예수를 따라갔다(απηλθον, orig. απερχομαι)”), 또 ‘아콜루테오’가 항상 제자에게만 사용된 것이 아니지만(3,7: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바닷가로 물러가시니, 갈릴래아에서 많은 사람이 따라왔다(ηκολουθησεν).”), 〈마르코복음〉에서 이 단어의 용례는 대부분 제자에게 전용되다시피 했다.
그래서 예수가 예루살렘으로 가는 비상한 상황에서, 제자들이 서로 ‘그 나라’가 도래할 때가 되었다는 ‘황홀한 기대감’ 속에서 제자 중의 제자인 베드로가 모두를 대표해서 “보십시오, 우리는 모든 것을 버리고 선생님을 따라왔습니다(ηκολουθηκαμεν).”(10,28)라고 떠벌렸다.
바로 그 장면 앞에는 한 부자 청년이 예수에게 다가와서 자신이 얼마나 신실하게 살아왔는지를 주장하면서 영생을 얻는 지혜를 말해달라고 했을 때 예수는 ‘가진 것을 다 팔고 나를 따르라(ακολουθει).’(10,21)고 말했다. 이것은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르는 삶이, 곧 자신의 제자들이 했던 것과 같은 삶이 바로 영생의 길임을 말했다. 하여 예수의 제자됨이란 ‘버림과 따름의 에토스’로 묘사될 수 있다는 해석이 제기되었다.
그리고 열두 제자를 부르시어 더러운 영들에 대한 권한을 주시고, 둘씩 짝지어 파견하기 시작하셨다. 그러면서 길을 떠날 때에 지팡이 외에는 아무것도, 빵도 여행 보따리도 전대에 돈도 가져가지 말라고 명령하시고, 신발은 신되 옷도 두 벌은 껴입지 말라고 이르셨다.(마르 6,7-9)
독일의 성서학자 게르트 타이쎈은 유랑, 무소유, 무가족을 예수운동의 핵심 에토스라고 주장했다. 그는 〈루가복음〉 9,3에도 나오는 이런 표현들은 결코, 초기 그리스도파 운동에서 일찍부터 리더십을 형성한 공동체 조직가들의 가르침일 수 없다는 점을 주목했다. 왜냐면 지역에 뿌리박은 안정계층인 그들이 이런 지도자의 자질을 강조했을 리 없기 때문이다. 하여 그는 다른 지도자 유형이 있음을 주장하면서 그들을 ‘유랑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Wander Karismatiker, wandering karismatic leaders)라고 불렀다. 그런데 예수와 그이의 제자들도 그렇게 살았다. 그러니까 예수와 제자들의 이런 리더십의 모습을 전승한 이들은, 공동체 조직가들이 아니라, 바로 예수와 가장 비슷한 방식으로 살았던 ‘유랑하는 카리스마적 지도자’라고 하는 것이다.
타이쎈의 주장의 요체는 유랑, 무소유, 무가족의 삶의 양식이 예수 활동의 역사성임을 발견하게 되었다는 데 있다. 기존의 예수 연구가 도달한 결론은 역사의 예수는 알 수 없다는 것이었다. 왜냐면 일찍부터 지역에 정착한 집단들 사이에서 형성된 그리스도공동체에서 예수 이야기가 전승되었는데, 그것은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예수를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들 그리스도공동체의 삶을 반영하고 있을 뿐이라고 보았기 때문이다. 요컨대 초기 그리스도파 공동체와 예수 사이에는 건널 수 없는 강이 흐르고 있다는 얘기다.
한데 타이쎈은 그 강을 건널 수 있는 배 한 척을 찾아냈다고 주장한다. 복음서라는 공동체가 구성한 문헌을 통해서는 그 강을 건너는 배를 발견할 수 없었는데, 복음서 속에 담긴 구술의 특정한 흔적(some trace of oral tradition)을 통해서 가능성을 찾아냈다는 것이다. 그 흔적은 공동체적 삶의 양식에 대해 해체적인, 그의 표현으로는 ‘급진적인 윤리’(radical ethics)를 담은 텍스트에서 찾아냈다. 공동체가 결코 전승시키고 싶지 않았을 급진적 윤리가 공동체의 문헌들 속에 남아 있었다는 것은, 지역공동체들을 순회하고 다니는 떠돌이 예언자들도 지역공동체에서 중요한 지도자로 떠받들어졌으며 그들이 예수가 그랬다고 가르쳤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여기서 하나 더, 타이쎈이 주장한 이런 급진적 윤리의 텍스트가 전승될 수 있는 메커니즘에 관한 논지를 이해해야 한다. 이러한 급진적 윤리를 그대로 따라 할 수 없었을 공동체가 생산한 문헌 속에 이런 얘기들이 어떻게 남아 있게 된 것일까. 그것은 바로 문서이기 때문이다. 문서라는 것은 ‘기억하고 기록하는’ 데 있어 탁월한 매체다. 설사 그 내용이 사람들에게 그대로 재현되지 않을지라도 기록은 가능하다. 문서라는 매체의 특성상 그렇다는 얘기다.
한데 그런 급진적 윤리가 문서에 기록되기까지는 그것을 전달하는 이들이 있어야 한다. 그 전달의 과정에서 구술의 과정이 있었다. 한데 구술이라는 매체는 그 내용을 수행하지 않는 이들에게는 기억되기 어렵다는 특징을 갖는다. 즉 이야기 속의 삶과 전승하는 자의 말이 유사하지 않으면 기억으로서 살아남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렇게 해서 이런 이야기가 살아남아 문헌텍스트 속에 기록될 수 있었던 것은 구술과 문자라는 다른 매체의 속성과 적절히 매칭됨으로써 가능했다는 것이 타이쎈의 설명이다.
한편 타이쎈은 자신이 역사의 예수에게 갈 수 있는 배를 발견했다고 하면서, 그 배의 재질이 ‘급진적 윤리’로 만들어졌음을 주장했다. 그것은, 아래 도표에서 보듯, ‘복음서 텍스트’, 떠돌이 예언자, 예수와 제자들이 '급진적 윤리’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하여 타이쎈은 이런 방법으로 예수와 제자들이 벌인 운동이 ‘유랑, 무소유, 무가족’이라는 윤리로 특성화할 수 있다는 결론에 이른다. 우리가 궁금한 것은 그이가 주도한 운동과 그 사회체제의 갈등이 어떠한 모습일까, 하는 점이다. 타이쎈은 그이의 운동을 수도자적 수행 윤리 같은 것으로 얘기하고 있다. 즉 타이쎈에게서 예수운동은 그 시공간적 성격을 상실하고 무시간적 윤리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타이쎈의 구술에 대한 해석은 문제가 있다. 앞에서 말했듯이 구술의 매체적 특성은 말과 삶의 유사성에 있다. 즉 구술은 그 내용이 기억하는 이의 삶과 유사하지 않으면 망각된다는 것이다. 앞에서 나는 그 원리를 〈마르코복음〉에 적용하면서 ‘체험의 유사성이 기억의 유사성을 낳았다’는 명제로 표현했다. 그런데 이런 구술연구의 원리는 구술문학을 통해 도출된 것이다. 즉 그것은 설화적 텍스트다. 한데 타이쎈은 그것을 스토리가 사라진 일종의 어록 같은 텍스트에 적용했다. 하여 그가 얻어낸 결론도 시간과 공간이 사라진 그 어록에 들어있는 무시간적인 윤리가 바로 예수운동의 특징이 되어버렸다.
반면 우리는 〈마르코복음〉이라는 구술문학 속에서 그 텍스트가 위치한 시공간적 맥락과 그 안에서 활동하는 행위자들의 기억에 주목하면서 역사의 예수를 읽고자 했다. 그런 관점에서 지난 몇 주 동안 예수운동의 장소적 전환을 주목하면서 예수운동의 성격을 살폈다. 그리고 오늘은 ‘제자’에 주목하면서 예수운동을 살피고 있다.
다시 이 장 처음에 얘기했던 것으로 돌아가보자. 예수의 제자됨은 ‘버리고 따랐다’는 말로 요약된다. 한데 그런 행위적 특성은 무시간적인 윤리의 산물이 아니다. 지난 몇주 동안 보았듯이 예수운동은 요한이 체포되면서 그이가 벌였던 운동의 계승자로서 대두하였다. 예수 자신이 요한이 벌인 운동의 참여자였고 그가 체포되자 갈릴래아의 카파르나움을 포스트로 삼아 요한의 운동을 계승했다. 그것을 사람들은 요한이 부활했다고 믿었다.
이것은 예수가 주도한 운동이 요한을 체포하고 처형한 안티파스 당국의 공권력의 추적 속에서 전개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에 예수와 그의 추종자들이 폈던 운동의 전략은 ‘끊임없는 이동’이었다. 처음에는 은거하기에 더없이 적합한 어촌마을 카파르나움을 포스트로 삼고 이 마을 저 마을을 돌아다녔다. 한데 마을 안에서도 대중을 억압하는 미시적 권력을 읽어낸 예수는 마을의 질서를 상징하는 장소인 촌락회당에서 그 질서의 상징적 표상인 안식일을 두고 그 질서를 대표하는 바리사이들과 일전을 벌였다. 그 결과 예수는 더 이상 마을 안에서 활동할 수 없게 되었다. 그리하여 예수일행은 마을밖을 전전하면서 활동을 벌여야 했다. 아마도 카파르나움에서도 은거가 그리 용이하지 않았을 수도 있다.
이런 사정으로 인해 예수와 그의 일행들은 점점 더 ‘생활의 기반들을 하나씩 하나씩 버리면서’ 운동에 참여해야 했다. 처음에 고향을 버렸고, 다음엔 비교적 안전한 은거지였던 마을 안의 집을 버렸다. 그리고 아무 것도 가진 것 없이 호숫가 공터로, 야산으로, 이방지역 등으로 이곳저곳을 전전하면서 활동했다. 바로 이런 행동양식을 평면적으로 압축하여 표현한 윤리적 해석이 베드로의 말에서 보듯 “모든 것을 버리고 따른다”는 명제로 표현된 것이다. 즉 그것은 무시간적 윤리가 아니었다.
김진호
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기획위원.
전 제3시대그리스도교연구소 연구소 연구실장, 한백교회 담임목사, 계간 《당대비평》 주간. 《경향신문》, 《한겨레신문》 《서울신문》 《주간경향》 《한겨레21》 등의 객원컬럼리스트. 《예수역사학》 《예수의 독설》 《리부팅 바울―권리 없는 자들의 신학을 위하여》 《급진적 자유주의자들. 요한복음》 《권력과 교회》 《시민K, 교회를 나가다》 《반신학의 미소》 등 지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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