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주간, 교회가 참회하고 신앙을 고백할 때
[주님 수난 성지주일; 2019.4.14] 이사 50,4-7; 필리 2,6-11; 루카 22,14-23,56/하느님 백성의 배신과 메시아의 수난
1. 오늘은 사순 시기의 막바지에 들어선 성주간을 시작하는 주님 수난 성지 주일입니다. 파스카 축제를 지내러 예루살렘에 구름처럼 모인 군중으로부터 성대한 환영을 받으시며 입성하신 예수님께서, 사두가이들로부터는 부활 논쟁으로 그리고 바리사이들로부터는 세금 논쟁으로 마치 사상 검증과도 같은 통과 의례를 거치신 후 제자들과 마지막 만찬을 드시면서 성체성사를 제정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두 논쟁에서 말문이 막힐 정도로 궁지에 몰리자 사두가이들은 예수님을 제거하기로 마음을 굳히고는 바리사이들의 묵시적 동조를 받는 한편, 바랍바라는 자신들의 동료를 구하려고 가담한 젤로데 당원들을 선동하고나서 로마 총독 빌라도의 권세를 빌어 예수님을 십자가형에 처하고 맙니다. 이들의 위세에 짓눌린 군중은 가까이서 침묵으로 동조하거나 멀리서 안타까이 지켜볼 수 밖에 없었습니다. 부화뇌동(附和雷同)이었습니다.
2. 모세의 활약과 이집트 탈출 사건 이래 천 년 이상이나 하느님 백성으로 살아온 이스라엘 백성이 당신 백성을 찾아오신 예수님을 환영하다가 돌연 태도를 바꾸어 배신하는 장면이 오늘의 복음 내용입니다.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은 이렇듯 대단히 극적인 드라마 같은 현실로 일어났습니다. 하지만 하느님 백성의 배신도, 그로 말미암은 메시아의 수난과 죽음도 그분의 부활을 향한 여정이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사두가이와 바리사이와 다수 군중으로 구성된 이스라엘의 배신으로 인해 메시아께서 수난을 당하셨지만, 부활하신 메시아께서 열두 제자를 포함한 소수의 이스라엘로 새로운 하느님 백성을 삼으셨습니다.
3. 메시아의 수난과 부활은 하느님 백성을 새롭게 하는 힘이 있습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는 <교회헌장> 8항에서 이렇게 선언한 바 있습니다.
“교회는 그 품에 죄인들을 품고 있으므로 거룩하면서도 항상 정화되어야 하겠기에 끊임없이 회개와 쇄신을 계속하는 것이다.”
잘못을 범한 유다인들의 존재에도 불구하고 이스라엘을 하느님께서 당신 백성으로 삼으신 역사적 선택은 취소될 수 없기 때문에, 교회는 새 이스라엘이 아니라 참이스라엘로 불리는 것이고, 공의회 역시 교회 역사상 잘못을 저지르는 교회 구성원들의 잘못을 기억하고 통공의 신비 원리에 따라서 인류 앞에 대신 참회를 하면서도 교회와 교회 구성원들을 구분합니다. 메시아께서 부활하시어 세우신 교회라는 참이스라엘은 여전히 거룩하지만 교회의 지체들은 과거 옛 이스라엘의 사두가이나 바리사이나 젤로데 그리고 다수 군중처럼 잘못을 범하기도 했다는 것입니다.
4. 지난 2000년을 대희년으로 선포하면서 교황 요한 바오로 2세는 <강생의 신비: 기억과 화해: 교회와 과거의 잘못들>이라는 문헌을 발표한 바 있습니다. 교황청 국제신학위원들을 시켜서 지난 이천 년 교회 역사를 뒤돌아보며 과거 잘못을 역사적으로 그리고 신학적으로 새로이 평가한 이 문헌은, 그 유산으로 남아 있는 온갖 형태의 폭력과 증오로부터 개인과 공동체의 양심을 자유롭게 하는 데 그 목적이 있습니다.
기억의 정화는 과거와 오늘날의 그리스도인이 범한 잘못들을 인정하는 용기와 겸손의 행위입니다. 이런 기억 행위는 교회 신비체 안에서 서로를 결합시키는 그 유대 즉 통공의 신비 때문에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화해 행위는 지금의 교회 구성원인 우리 모두는 비록 개인적으로는 책임이 없지만 우리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 이들의 오류와 잘못의 짐을 짊어지고 공동의 몫으로 보속함으로써 부활하신 메시아를 따라 하느님 백성으로서의 교회를 쇄신시킨다는 확신에 바탕을 두고 있습니다다.
교회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거룩함에 있어서는 흠이 없지만 하느님 앞에 무릎을 꿇고 오늘날은 물론 과거에 교황으로부터 일반 신자에 이르기까지 교회의 구성원들이 범한 죄에 대해 용서를 구할 것을 요청하는 것입니다.
5. 교회의 구성원들이 과거에 저지른 잘못들 가운데에는 교회를 분열시킨 과오도 있고, 과학적 신념이나 문화적 관습이나 개인적 양심을 인정하지 않은 과오도 있으며, 시대의 징표를 제 때에 식별하지 못해서 복음화를 지체시킨 과오도 있습니다.
11세기에는 로마 공동체의 수위권을 둘러싸고 동서방 교회가 서로 파문하며 갈라졌던 과오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오인 까닭은, 예수님께서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꼴찌가 되어야 한다고 가르치셨는데 서로 첫째가 되고자 다투었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동서방 교회가 갈라진 후 이슬람 세력이 예루살렘 성지를 점령하고 동방교회 지역을 위협하자 동방교회를 도와야 한다는 이유로 당시 우르바노 2세 교황의 호소로 시작된 십자군 전쟁은 동방 교회 신자들과 이슬람 신자들에게 막대한 피해와 상처를 주었고, 지금까지도 이슬람 세력권과 동방 교회 영향권 아래에 있는 가톨릭 공동체의 소외를 자초하는 선교적 실패를 야기키셨습니다. 칼을 쓰는 자는 칼로 망한다는 예수님의 가르침을 정면으로 거스르는 과오였습니다.
16세기에는 교황청의 베드로 대성전 건축을 둘러싸고 과도한 모금으로 인해 항의하는 개혁가들을 단죄하고 파문시키는 바람에 이들이 소위 프로테스탄트로 떨어져 나가게 만든 과오가 있습니다. 이것이 과오인 까닭은, 예수님께서 당시 복마전 노릇을 했던 예루살렘 성전을 정화시키시고 가난한 과부의 헌금을 칭찬하셨는데 성전을 화려하게 짓느라고 신자들에게 과중한 부담을 지웠으며 스스로 권력자요 부자가 되고자 했기 때문입니다. 이러한 과오들은 서로 사랑하고 용서해야 한다는 제자 윤리를 지키지 못한 책임의 문제를 발생시켰습니다.
6. 이러한 교회 내부 질서를 분열시킨 잘못만이 아니라 세상에서 성령의 이끄심에 따라 이룩된 진보와 성과를 알아보지 못하고 강압적으로 단죄하고 중단시킨 과오도 있습니다. 지동설을 주장했던 과학자 갈릴레이를 단죄한 일을 비롯해서 이단적 신념을 지닌 이들을 단죄했던 종교재판과, 억울한 이들을 마녀로 몰고 화형과 같은 잔인한 방식으로 처형했던 과오가 있고, 중국과 조선에서 조상을 공경하는 민간 풍습을 이해하지 못한 나머지 우상 숭배로 단죄하여 금지시키는 바람에 대규모 박해가 장기간 벌어지게 했던 과오가 있습니다. 이는 진리를 제대로 수호하지 못한 책임의 문제를 야기시킵니다.
7. 또한 산업혁명의 폐해로 빈익빈부익부 현상이 발생했을 때 일어난 노동자 운동을 무신론으로 몰아 단죄하기도 했고, 인간 존엄성을 주장하는 시민혁명이 일어났을 때 교회의 기득권을 방어하기 위하여 혁명의 여파로 생긴 사회 불안과 폭력을 빌미로 단죄했던 과오가 있습니다. 이는 역사 안에서 일어나는 사건들 속에서 성령께서 알려주시는 시대의 징표를 제때에 식별하지 못해 복음화를 지체시킨 선교적 책임과 정의를 구현하지 못한 책임 문제를 발생시킵니다.
8. 이러한 교회 구성원들의 역사상 과오들은 초대 교회와 그 전통을 이었던 고대 교회에서는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잘못들이고, 처음에는 그리스도 신앙과 교회를 박해하다가 신앙을 공인하고는 국교로까지 삼았던 로마 제국에 의해 교회가 포섭된 때문이었습니다. 박해받던 지하 교회, 서로 친교를 나누던 작은 공동체들의 연합이던 교회가 로마 제국 황제의 권력을 흉내된 제국 교회로 탈바꿈한 이 변신을 후대의 학자들은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는 말로 조소했습니다.
사실은 제2차 바티칸 공의회와 대희년 참회과 고백을 이룩한 지금에서야말로 진정한 코페르니쿠스적 전환을 이룩해야 할 때입니다. 이스라엘이 반면교사였다면 제국 교회로서의 면모를 지닌 과거 중세와 근세의 가톨릭 교회 역시 반면교사임에 틀림없기 때문입니다.
9. 대희년을 맞이하기 전에 제2차 바티칸 공의회는 새롭고 참신한 눈으로 교회 자신을 돌아보았고 세상과 대화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심지어 과거에 단죄하기 일쑤였던 무신론자들과 개신교 그리스도인들과도 대화를 하기 시작했으며, 동방교회와도 상호 파문을 철회했습니다. 교회의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 것입니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한 의미에서, 현대에 나타나고 있는 시대의 징표를 하느님 나라와 부활의 복음의 기준과 현대인들의 눈높이로 조명하고 식별한 새롭고 참신한 메시지가 가톨릭 사회교리입니다.
10. 예수님께서도 공생활 중에 하느님 나라의 복음을 선포하실 때, 도움을 청하러 다가오는 이들에게 필요한 공동선의 행동들을 기적으로서까지 일으켜서 도와주시면서 이를 지켜본 이들에게 여러 가지 비유로 가르치셨습니다. 그 비유들은 듣는 이들에 맞게 소재가 자유자재로 선택된 것이어서 알아듣기가 매우 쉬웠습니다. 이처럼 가톨릭 사회교리도 현대인들의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기 쉽게 전달하는 일이 과제입니다.
역사적 반성과 겸손한 성찰 위에 세상과 교회 자신을 관찰하고, 그 속에 담겨 있는 시대의 징표를 냉정하게 판단한 다음에, 교회 전체가 할 일과 개별 그리스도인들이 해야 할 일 그리고 작은 공동체들이 사도직으로 행해야 할 일들로 나누어서 실천하는 일이 중요합니다. 그래야 예수님을 닮은 교회와 그리스도인들의 행실을 보고 세상이 비로소 그분을 알아볼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제서야 쇄신되고 변화된 그 행실에 따라서 교회가 선포하는 부활 메시지를 조금이나마 알아들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메시아의 수난은 하느님 백성을 위한 하느님의 은총이었습니다. 메시아의 부활은 하느님 백성의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이는 개별 그리스도인들이 죽은 후에 영적인 몸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 사후 부활의 은총으로만 아니라 지금 여기서부터 우리가 사랑하고 봉사하며 희생하는 이들 가운데에서 기억과 감사의 마음으로 부활하는 은총을 누리게 되는 생생한 희망이 되어야 합니다. 수난 없이는 부활도 없음을 묵상하며 남은 성주간을 뜻깊게 보내기로 합시다.
이기우 신부
서울대교구, 영원한도움의성모수도회 파견사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