루터, 정당한 전쟁론의 계승자

양심적 병역 거부의 평화신학 이해, 재세례파 신앙을 중심으로-2

2018-11-12     박충구

루터의 종교 개혁 사상은 루터 개인의 신학적 사유가 아니라 그 시대의 요구에 대한 루터의 응답이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루터의 종교 개혁은 부패하고 타락한 당시 교회의 개혁을 요구함으로써 시대적 변화를 기다리던 세력의 호응과 지지를 받았다. 그가 번역한 성서를 손에 쥔 기독교인들은 가톨릭교회의 위선과 비성서적 제의를 비난하기 시작했고, 권력화된 종교의 타락의 깊이를 들여다볼 수 있었다. 성서에서 이탈한, 성서를 왜곡한, 비성서적 전통에 대한 비판은 종교 개혁을 받아들이는 이들에게서 첨예해졌다.

교회사가 트뢸취(Ernst Troeltsch)는 <기독교의 사회적 가르침>(Die Soziallllehren der christlichen Kirchen und Gruppen, 1911/12)에서 기독교 역사를 이렇게 유형화 하였다. 그는 예수의 가르침을 희석시키지 않으려는 비타협적 종파적 신앙(sect type), 예수의 가르침을 영적 체험 속에서 이해하려는 신비주의, 그리고 예수의 가르침을 대중 운동으로 변화시킨 타협주의적 입장을 교회 유형(Church type)으로 분류했다. 이 교회 유형을 로만 가톨릭 교회와 동일시했다. 트뢸취의 관점을 빌어 루터의 종교개혁 사상의 특징을 논한다면 주류 종교개혁 사상은 종파적 신앙의 성서주의, 신비주의 사상의 종교체험, 그리고 교회유형의 대중 운동 성격을 종합한 변종(hybridity)이다.

이런 특징은 비록 루터가 ‘오직 성서’로만 이라는 구호는 외쳤지만 사실상 예수의 평화사상의 온전한 회복에 대한 신념이나 믿음을 가지지 못했다는 뜻이다. 루터는 자신이 가톨릭 교회의 사제요 신학자로서, 그리고 군주의 보호와 지원을 받았던 사람으로서 지닌 한계를 감출 수 없었다. 그 역시 정당한 전쟁론의 계승자가 되었고 자신의 개혁 사상과 다른 견해를 가진 이를 권력으로 억압하거나 진압하는 것을 당연히 여겼다.

루터의 정치신학은 딤(Harald Diem)에 의하여 1938년 ‘두 왕국설’(Zwei-Reche-Lehre)이라고 불리어졌는데, 이에 앞서 칼 바르트(Karl Barth)나 헥켈(Johannes Heckel) 역시 루터의 사회사상을 일종의 두 정부론으로 이해했다. 두 정부론이란 하나님이 이 세상을 다스리는 방법으로 교회와 국가를 하나님의 질서로 세우셨다는 주장이다. 루터와 유사한 주장은 칼뱅(John Calvin)에 의해 더욱 호전적으로 해석되었고 하나님의 주권론(Herrschaft Gottes)의 강화로 이어졌다.

종교개혁 주류 세력은 기존의 권력구조를 이용했기 때문에 자신들의 신학적 해석 안에 국가 혹은 정치권력의 정당성을 주장할 근거를 마련해야 했다. 이런 점에서 이들은 종교 개혁 이전 가톨릭 교회의 신학적 체계 가운데 많은 부분을 수용하지 않으면 안 되었다. 그 대표적인 것이 바로 정치권력 혹은 국가권력에 대한 하나님의 위임론이다.

따라서 루터는 관헌을 (Obrigkeit) 하나님의 왼손으로, 칼뱅은 정치적 권위를 하나님이 세우신 것으로 해석했다. 특히 쯔빙글리히는 기독교적 국가 개념을 주장하며 무력에 의한 영적 통치까지 주장한 바 있다. 성서적 종교의 회복을 주장했던 종교 개혁자들은 가톨릭교회의 권위와 성례를 비판하면서도 자신들의 정치적 입지를 위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던 것이다.

박충구 교수
감신대 기독교윤리학과
저서로 <종교의 두 얼굴-평화와 폭력>, <예수의 윤리>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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