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수회 아루페 총장, “보다 가난하게, 보다 전 세계적으로”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32
프란치스코 교황을 배출한 예수회는 프란치스코 수도회, 도미니코 수도회, 살레시오 수도회 등과 나란히 세계적으로 가장 강력한 수도회 가운데 하나다. 예수회 창설자인 로욜라 이냐시오는 1526년 종교 재판소에서 이단으로 판정받고 감옥에 갇혔다가 가까스로 목숨을 건졌다.
예수회원들은 특별히 아메리카 대륙 선교에서 눈부신 활약을 보였으나, 롤랑 조페 감독의 영화 <미션>(The Mission)에서 보듯이, 스페인과 포르투갈 정부와 마찰을 일으켜 논란거리가 되었다. 결국 18세기에는 프랑스, 스페인, 포르투갈의 식민지에서 예수회원들이 추방되었다. 1773년에는 클레멘스 14세 교황이 식민지에서 정부를 마찰을 일으키던 예수회를 골칫거리로 여겨 아예 해산시켰다.
그러나 비오 7세 교황이 1814년 예수회를 다시 복권시킨 뒤로 예수회원들은 가톨릭교회의 동아시아 선교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 주었으며,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서 예수회원인 독일의 칼 라너와 미국의 코트니 머레이 등이 신학적으로 의미 있는 역할을 수행하였다.
예수회 아루페 총장, 완전한 봉사와 정의 실현 목표로
특히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마지막 회기였던 1965년에 총장으로 취임한 스페인 출신 페드로 아루페(Pedro Arrupe) 신부가 이끄는 예수회는 오푸스 데이와 달리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과 줄곧 불편한 관계를 유지했다.
아루페 신부는 히로시마에 원폭이 투하될 때 일본에서 의료 활동을 벌이고 있었기 때문에 정의평화운동에 관심이 컸으며, 제3세계와 대화하고 투신하려는 예수회원들을 격려했다. 특히 군사정권아래서 고통 받는 라틴아메리카 민중에 대한 ‘우선적 선택’을 감행했다.
1974년 제32차 예수회 총회에서는 복음 선교와 사회정의를 동일시하는 중대한 결정을 내렸다. 총회는 예수회의 성격을 규정하면서 “각 회원의 사명은 자신을 완전하게 봉사와 정의의 실현에 바치며, 그리스도의 대리자이신 교황께 충성을 서약하고, 보다 인간적이며, 나아가 하느님의 은총으로 가득 찬 세계를 만들기 위해 같은 십자가의 깃발 아래 모인 동지로서 생활과 임무와 희생적 행위를 함께 해야 한다.”고 밝혔다.
활동 안의 관상, "복음적 정의는 십자로 설명되어야 한다"
‘활동 안의 관상’을 중시하는 예수회 아루페 총장은 1974년 12월 20일 로마에서 “복음적 정의는 십자가와 함께 또는 십자가로부터 설명되어야 한다.”고 말했는데, “우리가 정의를 위해 몸 바쳐 일하려고 할 때마다 당장의 심한 아픔을 수반하는 십자가가 주어질 것”이기 때문이다. 이 말을 증명이라도 하는 것처럼, 아프리카와 라틴아메리카 등지에서 예수회원들의 순교가 줄을 이었다.
차드에서 레바논에서 예수회원들이 연이어 암살당했으며, 1976년에는 브라질에서 조안 보스코 페니노 브루니엘 신부가 가난한 인디오들을 돌보며 대변자 역할을 하다가 총에 맞아 죽었다. 1977년에는 엘살바도르에서 빈민 사목을 하던 루틸리오 그란데 신부가 총격을 받아 죽었다. 1980년에는 볼리비아의 라 파스에서 루이스 에스피날 신부가 역시 고문을 받고 총탄에 맞아 죽었다.
이런 상황에서 아루페 총장은 1977년 3월 19일 전 세계 예수회원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미래의 예수회를 위해 “늘 적극적으로 봉사하는 성실함과 교회에 대한 충성심을 구하며, 이냐시오를 따르고 성직자임을 더 깊이 자각하고, 동시에 오늘날 사람들을 괴롭히는 빈곤, 불안정, 부정 등에 실제로 접함으로써, 인류의 3분의 2에 해당하는 가난한 사람들과 똑같이 되어 ‘보다 가난하게’, ‘보다 전 세계적으로’ 되기를” 권고했다.
교황청이 예수회를 압박하다
한편 요한 바오로 2세 교황 이후에 교황청과 예수회의 관계가 더욱 악화되자 아루페 총장은 1980년 사임을 표명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자 교황은 예수회에 후임자 선출을 위한 회의를 연기하라고 명령하고 총장 선거에 개입했다. 교황은 예수회 내규의 효력을 정지시키고 자기 사람인 80세의 이탈리아인 예수회원 파울로 데자 신부를 임시 총장으로 지명했다. 이에 많은 예수회원들은 이런 교황의 방식에 격분했다.
이후 1981년에 아루페 총장이 갑자기 중풍에 걸리면서 1983년 9월 3일 33차 예수회 총회에서 레바논에서 활동하던 네덜란드 언어학자 피터 한스 콜벤바흐(Peter Hans Kolvenbach) 신부를 총장으로 선출했다. 그는 공개 석상에서 발언하는 일이 별로 없었던 사람이어서 처음엔 아무도 그의 성향을 알 수 없었다. 그런데 골벤바흐 총장은 아루페 총장과 마찬가지로 해방신학과 가난한 이들을 위한 활동에 헌신적이었다. 그는 2만 5천 명의 예수회원들에게 신자들의 신앙을 깊게 하고, 동시에 더 나은 사회를 추구하도록 도움으로써 사회 참여에 적극 나서도록 권고했다.
비록 예수회는 교황청에서 크게 환영받지는 못했지만, 한국을 포함해 제3세계에서 성소자가 크게 늘어나 안정적인 활동을 전개해 갔다. 한국 예수회의 경우에도 1980∼90년대에 성소자가 급증했고, 제주 강정에서 예수회원들은 해군 기지 건설을 반대하며 평화운동에 깊이 투신해 왔다.
예수회 출신 프란치스코 교황과 오푸스 데이
오푸스 데이에 대한 각별한 친밀감과 애정을 표시하던 교황들의 시대는 지나갔다. 이 상황에서 ‘교황에 대한 절대적 충성’을 수시로 공표하던 오푸스 데이가 예수회 출신인 프란치스코 교황에 대해서도 전임 교황에 대한 태도와 다름없는 충성을 보일지 미지수다. (현재 오푸스 데이는 조용히 조직을 유지하고 있다)
폭탄 세례를 견딜 만한 방탄유리를 장착한 시가 56만 5,000달러의 전용 차량에 탑승하던 베네딕토 16세 교황과 달리, 프란치스코 교황은 전용차 탑승을 거부하고 추기경 시절처럼 공용 버스를 이용한다. 해외 순방 길에서도 ‘두려움 없는 사랑으로’ 방탄유리 없는 오픈카를 타고 다닌다. 과연 귀족주의를 선호하는 오푸스 데이가 서민적이고 개방적인 프란치스코 교황에게 어떤 태도를 보일까?
베네딕토 16세 교황의 사임 발표 뒤에, 오푸스 데이 성직자치단장인 하비에르 에체바리아 주교는 교황 선출을 기원하며 장문의 사목서한을 발표한 적이 있다. 여기서 그는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된 1958년 콘클라베를 앞두고 오푸스 데이 창립자인 에스크리바가 한 말을 옮겨 적었다.
“나는 여러분에게 다가올 교황 선출에 관해 이야기하고 싶습니다. 여러분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교황님에 대한 사랑을 잘 알고 있을 겁니다. 예수님과 성모님 다음으로 우리는 모든 영적인 힘을 다해 교황님을 사랑합니다. 어떤 분이 되든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미 새로 오실 교황님을 사랑합니다. 우리는 삶 전체를 통해 그분을 섬기기로 마음먹었습니다.”
그러나 에스크리바는 요한 23세가 교황으로 선출되자 요한 23세 교황과 제2차 바티칸 공의회에 대해 애매한 태도를 보였다. “그동안 제2차 바티칸 공의회가 잘못 이해되어 왔다.”고 말해 온 요한 바오로 2세와 베네딕토 16세 교황에게만 충성을 다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헌 가운데 가장 진보적인 내용을 담고 있는 <교회헌장>과 <사목헌장>은 회기 마지막 해인 1965년에야 가서야 합의 인준을 받았을 만큼 공의회 문헌은 진보적 견해와 보수적 견해가 적절하게 타협한 성과물이다. 따라서 문헌에 대한 해석도 다양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요한 23세 교황이 추구한 ‘교회 개혁’의 흐름은 분명하다. 현대 세계에 교회가 조응하고, 특별히 고통 받는 인류에게 기쁨과 희망이 되라는 것이다.
한편 2013년 3월 13일 예수회 출신의 프란치스코 교황이 선출되던 당일 오푸스 데이 성직자치단장 에체바리아 주교는 “가톨릭 신자들에게는 이 순간이 큰 기쁨으로 다가옵니다. 새 교황님 프란시스코 1세는 베드로 성인의 266번째의 후계자입니다. 흰 연기를 보았을 때부터 감사의 기도를 드렸고, 지금은 베네딕도 16세께서 하셨던 말씀대로 새 교황님께 존경과 순명을 약속드립니다.”라는 아주 짧은 논평을 내놓았을 뿐이다. 프란치스코 교황은 2013년 3월 13일 성 베드로 성당 발코니에서 군중들에게 “좋은 저녁입니다.”라고 인사했는데, 오푸스 데이에게는 ‘나쁜 저녁’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출처] <행동하는 교황, 파파 프란치스코, 한상봉, 다섯수레, 2014
한상봉 이시도로
<가톨릭일꾼> 편집장
<도로시데이 영성센터> 코디네이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