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일상에 스며드는 진리
제2부 사랑받는 사람이 되어가기
친구여, 성령을 따라가는 삶에서, 사랑받는 사람으로 존재하는 것은 원천에 반드시 필요하다.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진리를 깨닫는 그 순간부터 우리는 본래의 모습대로 되어가라는 초대에 직면하게 된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은 우리가 갈 수밖에 없는 위대한 영적 여정이다. “오 하느님, 제 영혼은 당신 안에 쉴 때까지는 결코 쉴 수가 없습니다”라고 어거스틴 성인은 이 여정을 매우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
내 자신이 항상 하느님을 찾고 있으며, 항상 충만한 사랑을 발견하기 위하여 애쓰고 완전한 진리를 항상 갈망하고 있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나에게 하느님, 사랑, 진리에 대한 끌림, 맛이 주어졌다는 사실을 말해주고 있다. 어떤 의미에서 나는 이미 발견된 것만을 추구할 수 있을 따름이기 때문이다. 이미 내 마음 깊은 곳에서 나에게 알려진 아름다움과 진리가 없다면 내가 어떻게 아름다움과 진리를 추구할 수 있겠는가? 모든 인간들은 그들이 잃어버린 낙원에 대한 깊은 내적 기억들을 지니고 있는 것 같다.
아마도 “순진함”이란 단어는 “낙원”이란 말보다 더 나은 말일 것이다. 우리는 죄책감을 느끼기 전에 순진했었다. 어둠 속에 들어가기 전에 우리는 빛 속에 있었고 집을 찾아 헤매기 전에 집에 있었던 것이다. 우리의 마음과 정신 가장 깊숙한 곳에 우리가 찾고 있는 보물이 숨겨진 채 있다. 우리는 그 보물이 얼마나 귀중한지 알고 있으며 우리가 가장 갈망하는 선물을 우리가 이미 갖고 있음도 안다. 그 선물은 생명이 죽음보다 강하다는 진리이다.
우리들이 사랑받는 존재일뿐만 아니라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야 하며, 우리가 하느님의 자녀들일뿐 아니라 그렇게 되어야 하고, 우리들이 형제자매일뿐만 아니라 형제자매가 되어야 하는 것이 사실이라면 어떻게 이 '되어가는' 과정을 진지하게 할 수 있을까? 영적인 삶이 단순히 존재하는 것만 아니라 되어가는 길이라면, 이 되어간다는 것의 속성은 무엇인가?
우리는 '되어가는' 존재이다
첫 번째의 순진함으로부터 두 번째의 순진함으로, 첫 번째의 자녀됨으로부터 두 번째의 자녀됨으로, 사랑받는 존재로부터 충만하게 사랑받는 존재로 되어가는 것을 어떻게 할 수 있는가하고 당신은 당연히 물을 수 있다. 이 질문은 우리로 하여금 어떤 낭만주의나 이상주의를 넘어 일상생활의 매우 구체적인 측면을 다루도록 요구하므로 매우 중대한 질문이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은 우리자신의 사랑 받음이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거나 행동하는 모든 것 안에서 육화 되어간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과정은 길고도 고통스러운 노력, 아니 육화의 과정이다. “사랑받는 존재로 있는 것”이 나의 삶 위에서 추상적으로 머무는 어떤 아름다운 생각이나 고상한 아이디어로 남아있는 한 아무것도 참으로 변화될 수 없다.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은 내가 일상을 살고 있는 평범한 자리와 상황 속에서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것이며 조금씩 조금씩 되어지고 싶은 내 모습과 일상생활의 수많은 특정한 현실사이에 있는 차이를 좁혀가는 것이다.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간다는 것은 나에게 드러난 진리를 위로부터 아래의 일상적인 상황 속에 끌어들이는 것으로서 매시간 내가 생각하고 말하고 행동하는 것 안에 이 진리가 표현되는 것이다.
오늘날 대부분의 사람들은 수많은 압력을 받으며 살아가고 있다. 매일 의식주를 해결하기 위하여 일해야 하고 가족들, 친지들과 관계를 맺으며 살고 있는 자리, 사회, 국가, 세계에서 무엇이 일어나고 있는지 알아야 한다. 이 모든 것들은 한 사람이 감당하기에는 너무나 많은 것 같다. 그리고 일상 생활의 이런 간단하고 구체적인 것들이 우리가 나누는 대화에 주제들을 제공한다.
“어떻게 지내느냐?”는 질문은 보통 결혼, 가족, 건강, 직업, 돈, 친지들과 가까운 장래 계획들에 관한 질문으로 여겨진다. 우리 존재의 원천과 목표에 관한 깊은 생각까지 이끌어내는 질문이 되는 경우는 거의 드물다. 그렇지만 우리 존재의 시작과 끝은 여전히 일상 속에서 우리가 생각하고 말하며 행동하는 모든 방식들과 깊히 연관되어 있음을 나는 너무나 확신하고 있다.
가장 깊은 진리는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이며 우리의 가장 큰 기쁨과 평화는 이 진리를 온전히 깨달음으로부터 오는 것이지만, 이 진리는 우리가 먹고 마시며, 말하고 사랑하고 놀고 일하는 일상 속에서 보여질 수 있고 만져질 수 있어야 하는 것이다. 우리 삶의 가장 깊은 흐름이 일상이라는 표면의 파도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다면 우리의 생명력은 점차 약해져서 아무리 바쁠 때에도 지루해하고 열의가 없는 상태에 빠지게 될 것이다.
역동적인 심리의 세계와 성령의 움직임
그러므로 우리의 일상생활과 이처럼 밀접하게 연결되어 있는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과정에 대하여 말하는 것은 중대한 과제이다. 먼저 우리자신 안에서 또한 주변에서 일어나고 있는 성령의 움직임들에 대하여 알아봐야 하겠다. 여러분도 알다시피 우리는 매우 “심리학적인” 시대에 살고 있다. 우리는 우리자신의 감정, 욕망, 느낌들에 대하여 많은 것을 알고 있다.
어린 시절의 경험들과 현재의 행동방식에 많은 연결점이 있다는 사실도 너무나 잘 안다. 우리들의 정신과 성의 변화에 관해서도 매우 복잡하고 냉소적인 인식을 하게 되어 언제 우리가 희생되고 또 언제 진정한 자유를 느끼는지 쉽사리 판단할 수 있다. 또한 우리는 자신이 방어적이 되는 것에 대해서도 안다. 우리자신의 필요와 두려움을 이웃에게 투사하며 자신에 대한 회의가 창의적인 삶에 걸림돌이 된다는 사실도 알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서 내가 던지고 싶은 질문은 심리적인 여정에 대하여 알고 표현하는 것처럼 영적인 여정에 대해서도 알고 표현하는 것이 가능하겠는가이다. 우리자신의 “심리적인”역동성을 깨달을 수 있는 것처럼 그와 똑같은 구체적인 방식으로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이 신비스러운 과정을 우리가 표현하고 실행할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그런데 역동적인 심리의 세계는 성령의 움직임과 실제로는 매우 다른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이 든다. 심리와 성령의 세계는 연결되어 있고 또 많은 방식으로 상호작용하고 있지만 다른 것이 사실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내가 표현하고자 하는 것은 우리의 일상 투쟁 속에 사랑의 성령의 움직임들이 어떻게 드러나는가 이고 이러한 움직임들을 알아보고 행동으로 그 움직임에 응답할 수 있는 원칙들을 우리가 어떻게 정리할 수 있겠는가 하는 것이다.
받아들여짐, 축복받음, 부서짐 그리고 줌
일상생활 속에서 성령의 움직임들을 알아보기 위하여 나는 받아들여짐, 축복받음, 부서짐 그리고 줌이라는 네 가지 말들이 도움이 된다는 것을 발견했다. 이 말들은 사제로서의 나의 삶을 요약해주는데, 공동체 사람들과 함께 모여 매일같이 빵을 들고 축복하며 나누고, 주기 때문이다. 또한 이 말들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나의 삶을 요약한다. 나는 이 세상을 위한 빵이 되도록 부름을 받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이 말들의 가장 중대한 의미는 인간존재로서의 나의 삶을 요약해주는데, 그것은 나의 삶의 모든 자리와 모든 순간에 들어올려지고 축복 받으며 부서지고 나누어지는 일들이 일어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시점에서 나는 네 가지 말들이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말이 되고 있음을 말해야겠다. 그러나 이 말들의 의미는 단지 점차적으로 나에게 알려졌으며 아마도 그 완전하고 깊은 의미를 결코 다 이해할 수 없을 것이라고 여겨진다. 이 말들은 가장 개인적인 말이면서도 가장 보편적인 말이기도 하다. 또한 가장 세상적인 진리를 표현하면서도 가장 영적인 진리를 말해주고 있다. 가장 인간다운 행동에 대해서 말해주면서도 가장 거룩한 존재에 대해서 말한다.
이 말들은 가장 낮게 또한 가장 높게 미치는 말이며 사람들뿐만 아니라 하느님까지 포용한다. 삶의 복잡함에 대하여 간단명료하게 표현하면서도 끝없이 드러나는 신비를 포함하고 있다. 이 말들은 이스라엘의 위대한 예언자들과 나자렛 예수의 삶에 대한 이해에 열쇠가 될 뿐만 아니라 우리 삶에 대한 이해에 있어서도 열쇠이다. 이 말들은 나의 존재에 너무나 깊숙히 각인되어 있을뿐만 아니라, 이 말들을 통하여 나는 하느님의 사랑받는 존재가 되어가는 길들과 만날 수 있는 것이다.
[원출처] <사랑받는 사람의 삶 Life of the Beloved -세상 속에서 영적인 삶을>, 헨리 나웬,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1999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