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헨리 나웬] 사랑받는 사람으로 존재하기

2018-06-25     헨리 나웬

영적인 삶에 대하여 말해 달라고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이 부탁한 뒤로,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을 당신이 모두 읽은 후 꼭 기억했으면 하고 가장 바라는 말이 무엇일까 쭉 생각해왔다. 지난 수년간 나의 깊은 마음속으로부터 점차 떠오르기 시작한 특별한 말이 있다. 그것은 “사랑받는 자”라는 말이며, 나는 이 말이 당신과 당신의 친구들을 위한 말로서 나에게 주어졌다고 확신한다.

사랑받는다는 것

그리스도인으로서 나는 나자렛 예수의 세례 이야기에서 이 말을 처음 알게 되었다. “예수께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시자 홀연히 하늘이 열리고 하느님의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당신 위에 내려오시는 것이 보였다. 그때 하늘에서 이런 소리가 들려왔다.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 내 마음에 드는 아들이다.’”

많은 세월동안 나는 설교와 강의를 하면서 이 말을 읽고 또 성찰해왔다. 그러나 뉴욕에서 당신과 대화를 나누면서 그리스도교 전통을 훨씬 넘어서는 어떤 의미가 이 말속에 있음을 비로소 깨닫게 되었다. 당신과의 많은 대화를 통하여 나는 “당신은 사랑받는 사람이다”라는 말이 어떤 특정한 종교나 전통에 상관없이 모든 인간존재에 관하여 가장 내밀한 진리를 표현하고 있다는 내적인 확신을 갖게되었다.

당신에게 말하고 싶은 것은 “당신이 사랑받는 존재”라는 것이며, 이 말을 당신이 들을 때에는 사랑이 표현할 수 있는 모든 부드러움과 힘이 당신에게 주어진다고 생각하기를 바란다. 내가 바라는 유일한 소망은 당신 삶의 모든 순간에 “당신은 사랑받는 존재입니다”라는 말들이 울려 퍼지는 것이다.

 

부드럽게 혹은 소리쳐 선언하는 목소리

우리들의 위대한 우정의 선물이 당신에게 줄 수 있는 것은 당신이 사랑 받고 있다는 사실을 깨닫는 것이다. 이 사실을 스스로 내 자신에게 주장할 수 있는 만큼 나는 당신에게 이 선물을 줄 수 있다. 우정이란 바로 그런 것이 아니겠는가, 우리가 사랑받는 존재라는 선물을 서로에게 주는 것이?

그렇다. 위로부터 그리고 내면으로부터 부드럽게 혹은 소리쳐 선언하는 목소리가 있으며 이 목소리는 이렇게 말한다: “너는 내가 사랑하는 사람이며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 물론 “너는 좋지가 않다. 너는 밉다. 너는 가치가 없다. 너는 비열하다. 너는 아무 것도 아니다. 네가 이 모든 것의 반대를 표현할 수 없는 한 너는 보잘 것 없는 존재다”라고 외쳐대는 소리들로 가득찬 세계에서 그런 소리를 듣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이 부정적인 소리들은 너무나 크고 집요해서 그 말들을 믿는 것이 더 쉽다. 이것이 바로 큰 함정이다. 자아부정의 함정이다. 지난 수년동안 나는 우리의 삶에서 가장 큰 함정은 성공, 인기 혹은 권력이 아니라 자기부정임을 깨닫게 되었다. 성공, 인기 그리고 권력은 큰 유혹으로 다가올 수 있으나 이런 것들의 유혹적인 측면은 자기부정이라는 더 큰 유혹의 한 부분으로서 자주 오게 된다.

우리가 스스로 가치 없고 사랑 받을 수 없는 존재라는 소리들을 믿게 되면 성공, 인기, 그리고 권력은 매력적인 해결책으로 쉽사리 인식된다. 그러나 진짜 함정은 바로 자기부정, 자기거부이다. 나는 얼마나 내 자신이 얼마나 빨리 이런 유혹에 빠지는지 끊임없이 놀라고 있다. 어떤 사람이 나를 비난하거나 비판할 때에, 내가 거부당할 때에, 홀로 내버려지고 포기될 때에 나는 이렇게 생각하곤 한다: “그래, 내가 아무 것도 아니라는 사실이 다시 한번 증명된 것이야.”

나를 비난하는 나

상황에 대하여 비판적인 관찰을 하거나 내 자신과 다른 사람들의 한계를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대신에 나는 내 자신을 비난하려는 성향이 크다. 그것도 내가 한 일에 대해서가 아니라 내가 어떤 존재인가에 대해서 그렇게 자신을 비난하는 것이다. 나의 어두운 측면은 말한다: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야... 나는 소외되고, 잊혀지고 거부되고 포기되어 마땅한 존재야.”

아마도 당신은 자기부정보다 오만함에 더 빠지기가 쉽다고 생각할 지 모른다. 그러나 오만함은 실상 자기부정의 다른 측면이 아닐까? 오만함은 당신이 있는 대로의 자기 모습을 보는 것을 피하기 위하여 스스로를 존경하는 태도가 아닌가? 오만함을 최종적으로 분석해보면 쓸모 없음의 느낌을 다루는 또 다른 방식이 아닐까?

자기부정과 오만함은 우리들을 공동의 존재의 현실로부터 이끌어내어 불가능하지는 않지만 달성하기에 무척 어려운 부드러운 공동체를 만들도록 한다. 나는 나의 자아부정 속에 엄청난 자만심이 있는 것처럼, 나의 오만함 뒤에 엄청난 자기부정이 자리잡고 있음을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내가 기세가 등등하든 그 반대로 위축되건 간에 진실과의 접촉을 잃게 되고 실재에 관한 나의 비젼은 왜곡되는 것이다.

모든 사랑의 징표들

당신이 자신 안에서 자아부정의 유혹을 어느정도 파악할 수 있게 되기를 바란다. 이 자아부정은 오만함이나 낮은 자기평가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다. 자아부정은 대부분 불안정한 사람의 신경증적인 표현으로 여겨지고 있다. 그러나 신경증은 자주 그리고 훨씬 더 깊은 인간의 어두움을 심리적으로 표현해주고 있는 증상이다. 이 어두움이란 자신의 존재가 참으로 환영받지 못하고 있다는 느낌을 말한다. 자기부정은 우리에게 “사랑받는 존재”라고 말해주는 거룩한 목소리와 대립되기 때문에 영적 삶에 가장 큰 적이 된다.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간다는 것은 우리의 실존에 핵심적인 진실이다.

나는 이 사실을 직접적으로 그리고 너무나 단순하게 표현하고 있는데, 그것은 사랑받는 존재임을 깨닫는 체험이 나의 삶에서 완전히 없었던 적이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사실을 나의 핵심적인 진실로 주장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나는 그저 크고 작은 움직임들 속에 파묻혀 달리기를 계속하면서 항상 어떤 사람이나 어떤 것이 나의 사랑 받음을 확신시켜 주기를 바래왔을 뿐이다. 마치 내 존재의 심연에서 “너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며 내 마음에 드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목소리를 듣기를 거부해 온 것 같다.

그 목소리는 항상 그곳에 있어왔으나 나는 다른 목소리들, 더 큰 소리들이 “네가 가치 있음을 증명해 보아라; 더 크고 더 강력한 어떤 일을 해 보아라. 그러면 네가 그렇게나 원하는 사랑을 얻게 될 것이다”라고 말하는 것을 더 열심히 들으려고 해 왔던 것 같다. 그러는 동안 침묵 속에서, 내 마음의 고독 속에서 말하는 부드럽고 사랑스러운 목소리는 들리지 않은 채 남아 있거나 전혀 확신을 받지 못한 채 방치되어 있었던 것이다.

부드럽고 사랑스럽게 내가 사랑받는 존재라고 알려주는 이 목소리는 수많은 방식으로 나에게 다가오고 있다. 나의 부모들, 친구들, 스승들, 학생들과 많은 낯선 이들은 나의 삶을 거쳐가면서 그 부드러운 목소리를 다양한 억양으로 들려주었다. 나는 많은 사람들로부터 부드러움과 사랑을 받아왔다. 나는 참고 끈기있게 살라는 가르침을 많이 받았다. 나는 포기하고 싶을 때에도 계속 하라는 격려를 받았고 실패했을 때에 다시 해보라는 자극을 받았다. 나는 보상을 받았고 또 성공에 대하여 칭찬도 들었다...

그러나 어떻든지 간에 이런 모든 사랑의 징표들은 내가 사랑받는 사람임을 확신하는 데에 충분하지 못했다. 강한 자기 확신을 가지고 있는 것처럼 보였지만 늘 그 뒤에는 이런 질문이 남아있었다: “이렇게 많은 애정을 나에게 쏟아준 사람들이 가장 깊은 내면의 내 모습을 보고 또 알 수 있을까, 또 그때에도 나를 사랑할 것인가?” 이런 괴로운 질문이 나의 깊은 그늘 속에 뿌리를 박고 있었으며 나를 끝없이 괴롭혔다. 또한 나로 하여금 나를 사랑받는 사람이라고 말해주는 그 내면의 고요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자리로부터 도망하게 만들었다.

 

영적인 고갈과 소모에 이르는 길

나는 당신이 내가 말하고 있는 내용을 이해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당신도 나처럼 어떤 사람이나 어떤 사건, 사물이 당신이 원하는 마지막 내적 느낌을 주기를 바라지 않는가? 당신은 자주 이렇게 희망을 가지지 않는가: “이 책이나 생각, 강좌, 여행, 직업, 나라 혹은 관계가 나의 가장 깊은 갈망을 채워주기를.” 그러나 그 신비스러운 움직임을 기다리면서도 당신은 허둥지둥대고, 항상 불안하고 쉬지 못하며, 늘 욕망에 가득차 있고 분노하며, 결코 완전히 만족하지 못한 채 살고 있다.

당신은 이런 모습이 우리를 계속 움직이게 하고 분주하게 만드는 충동임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동시에 이런 충동들은 우리로 하여금 결국 마지막에 우리가 어떤 곳에 다다를 것인가 말 것인가에 대하여 의심하도록 만들기도 한다. 이것이 바로 영적인 고갈과 소모에 이르는 길이다. 영적인 죽음에 이르는 길인 것이다.

당신과 나는 우리 자신들을 죽일 필요가 없다. 우리는 사랑받는 존재들이다. 우리는 부모들, 교사들, 배우자들, 아이들과 친구들이 사랑해주거나 상처를 주기 훨씬 전부터 친밀하게 사랑을 받고 있는 존재들이다. 이것이 우리 삶의 진실이다. 이것이 내 자신에게나 당신에게 주장하고자 하는 진실이다. 이것이 “너는 나의 사랑하는 사람이다”라고 말하는 목소리에 의해 밝혀진 진실이다.

매우 주의깊게 그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면서 나는 나의 중심에서 이렇게 말하는 소리를 듣는다:

“나는 처음부터 너의 이름을 불러왔다. 너는 나의 것이며 나는 너의 것이다. 너는 나의 사랑하는 존재이며 내 마음에 드는 존재이다. 나는 땅의 심연으로부터 너를 만들었고, 너의 어머니의 움에서 너를 함께 만들어내었다. 나는 너를 내 손바닥에 새겼고 내 품안에 너를 숨겼다. 나는 너를 끝없는 부드러움으로 바라보고 어머니가 아이를 돌보는 것보다 더 친밀하게 너를 돌보고 있다. 나는 너의 머리카락 하나하나를 세고 있으며 매 걸음걸음 너를 이끌어오고 있다.

네가 어디 가든지 간에 나는 너와 함께 가고, 어디에서 쉬든지 간에 너를 지켜보고 있다. 너의 굶주림을 채워 줄 음식을 너에게 주고 네 갈증을 가시게 해줄 음료를 너에게 줄 것이다. 내 얼굴을 너에게서 감추지 않을 것이다. 너는 마치 네 자신처럼 나를 알고 있고 나도 내 자신처럼 너를 알고 있다. 너는 나에게 속한다. 나는 너의 아버지, 어머니, 형제, 자매, 연인 그리고 배우자이다... 그렇다 나는 너의 자녀이기도 하다... 네가 어디있든지 간에 나도 그곳에 함께 있을 것이다. 아무것도 우리를 떼어놓을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다.”

당신을 사랑받는 존재라고 부르는 그 목소리에 집중할 때마다 당신은 그 목소리를 더 길게 더 깊이 듣고 싶은 갈망을 당신 안에서 발견하게 될 것이다. 마치 사막에서 우물을 발견하는 것과 같다. 젖은 땅을 만지게 되면 더 깊이 파고 싶은 법이다.

더이상 방황하기를 원하지 않는다

나는 최근들어 파는 작업을 더 많이 더 깊게 해오고 있으며 이제 메마른 모래땅을 헤치고 졸졸 흐르는 작은 시냇물을 보기 시작하고 있음을 안다. 나는 계속 파야한다. 그 작은 시내는 나의 삶의 사막 너머에 있는 거대한 저수지로부터 오고 있기 때문이다. “판다”라는 말은 가장 좋은 말은 아닌 것 같다. 판다는 것은 어렵고도 고통스러운 일을 의미하고 그렇게 하여 나의 갈증을 씻을 수 있는 자리로 나를 이끌어가기 때문이다. 

아마도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그저 해야할 모든 일은 샘을 덮고 있는 마른 모래들을 걷어내는 것뿐이다. 우리 자신 안에는 마른 모래가 꽤 쌓여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우리의 갈증이 가시기를 너무나 바라는 그 존재는 우리가 그 모래를 치울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다. 우리에게 참으로 필요한 것은 물을 찾고 그 물을 마시려는 강한 갈망을 지니는 것이다.

당신은 더 주위를 돌아보고 더 기다려보고자 한다. 그렇게 하여 영적인 삶이 당신의 모든 에너지를 다 부여할 만큼 귀중한 것인가 알아보고 싶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당신을 더 이상 기다릴 수 없는지도 모르겠다. 당신이 더 이상 시간을 낭비하지 않기를 바란다! 나는 살아갈 나날이 살아온 날들보다 적다.

당신은 나와 반대이기를 바란다. 그러므로 나는 타인에게 이미, 지금 확인하고자 한다. 더 이상 찾는 작업에 매달리지 말라고. 계속할수록 당신은 답답함을 느끼게 될 것이다. 당신은 더 이상 조작하는 세계의 희생자가 되거나 어떤 종류의 중독 현상에 갇힐 필요가 없다. 당신은 지금 더 진실되고 더 내적인 자유를 찾기 위해 나아가고 더 온전한 자유를 찾을 수 있는 선택을 해야한다.

그러므로 당신이 사랑받는 사람으로서의 여정을 시작하는데 관심이 있다면 나는 당신에게 해 줄 말이 너무 많다. 영적인 삶의 여정은 어떤 결단을 요청할 뿐만 아니라 건너야 할 강에 대한 어떤 지식을 알아야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나는 우리의 신앙 선조들이 40년 동안 사막에서 헤맸던 것처럼 당신이 방황하기를 원치 않는다. 또 내가 그 광야에서 오랫동안 살았던 만큼이나 당신이 머물기를 원하지 않는다.

당신은 나에게 매우 소중한 사람이고 내가 참으로 사랑하는 친구이다. 비록 모든 사람이 스스로 배운다는 사실도 역시 진실이지만 나는 우리가 사랑하는 사람들이 똑같은 실수를 저지르지 않도록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한다. 영적인 삶의 과정에서 우리들에게는 안내자들이 필요하다. 이제부터 쓰려고 하는 이야기들을 통해 나는 당신에게 안내자가 되고싶다. 당신이 이 영적인 삶의 여정을 함께 걸어가는 데 게속 관심이 있기를 바랄 뿐이다.

[원출처] <사랑받는 사람의 삶 Life of the Beloved -세상 속에서 영적인 삶을­>, 헨리 나웬, 
[번역문 출처] <참사람되어>, 1999년 7월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