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공부] 어디서나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자유
마르코와 요한의 복음서-8
요한이 그의 복음서의 더 심오한 메시지를 표현하는 또 하나의 방식은 잘 구성된 대화 형식이다. 종종 사람들이 질문을 하러 예수님께 오면 그분은 그들을 대화로 끌어들이신다. 대화를 주고받으면서 예수님은 상대방이 충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의미를 들어낼 수 있는 깊이 있는 대화로 이끌어 가시는데, 복음서 독자들도 여기에 깊이 들어오도록 초대된다.
예를들어 제3장에서 니고데모라는 유다인 지도자는 다른 사람들이 자기가 예수님을 찾아 간 것을 알게되는 것이 두려워서 밤에 몰래 그분을 찾아간다. 몇 마디를 나누신 다음 예수님께서는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지” 않으면 하느님 나라를 볼 수 없다고 그에게 말씀하신다. 도대체 무슨 뜻인가? 다 자란 사람이 어떻게 다시 태어날 수 있느냐고 묻는 니고데모에게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대답하신다:
"정말 잘 들어 두어라
물과 성령으로 새로 나지 않으면
아무도 하느님 나라에 들어 갈 수 없다;
육에서 나온 것은 육이며
영에서 나온 것은 영이다.
새로 태어나야 된다는 내 말을 이상하게
생각하지 말라." (요한 3,5-7)
우리는 예수님께서 육체적이 아닌 영적으로 새로 태어나야 한다는 것에 관해 말씀하신다는 것을 금방 알 수 있다. 말씀하신 것을 설명하시려고 예수님께서는 계속하신다:
"바람은 제가 불고 싶은 대로 분다.
너는 그 소리를 듣고도 어디서 불어와서
어디로 가는지를 모른다.
성령으로 난 사람은 누구든지 이와 마찬가지다." (요한 3,8)
세속적인 관점에서 볼 때, 성령의 인도를 받은 사람들은 예측 불가능하다. 그러나 다른면에서 보면 완전히 예측 가능하다. 그들은 늘 하느님의 뜻을 실천하려고 한다. 그들은 사회적 법규나 다른 사람들이 어떻게 생각하든 상관치 않고 분명히 선한 것을 하려고 한다. 이것이 바로 하느님 자녀들이 갖는 자유이다. 그것이 바로 하느님 나라에서 볼 수 있는 자유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런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그들은 자기들의 오래된 타성에 너무도 안주해 있다. 그들은 자기들의 생활 방법에 너무나 편안해 한다.
여러면에서 그들은 다음 대화에 나오는 우물가에서 예수님과 이야기하고 있는 여인과 비슷하다. 그녀는 삶에서 무언가를 더 얻고 싶어하므로 예수님께서는 그녀에게 “생명의 물”을 말씀하신다. 또다른 수수께끼 같은 말씀이다! 그 여인은 예수님께 어떻게 그것을 샘에서 길어 올릴 수 있느냐고 묻는다. 그러나 그분은 대답하신다:
"이 우물물을 마시는 사람은 다시
목마르겠지만;
내가 주는 물을 마시는 사람은 영원히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내가 주는 물은 그 사람 속에서 샘물처럼
솟아올라 영원히 살게 할 것이다."
(요한 4,13b-14)
예수께서는 이 여인에게 아주 새롭고, 전혀 다른 무엇인가를 제안하신다. 그분은 그녀에게 밖으로부터 흥분되는 것이 아니라 안에서 나오는 힘을 지닌 생명을 제안하시는 것이다. 그분은 교회나 그외의 다른 곳에서만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어디서든 하느님을 만날 수 있는 자유를 이야기하신다. 그분은 그녀가 자신이 알고 있는 행복을 위해서 다른 사람에게 완전히 의존하는 대신 다른 사람에게 행복의 근원이 될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신다.
니고데모와의 대화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여인도 예수님께서 어디로 그녀를 이끌어 가시는지 잘 알지 못한다. 그러나 그녀는 우리들 모두가 해야하는 것처럼, 자신을 내어 주어 주님이 이끌게 하시고 주님 앞에서 아주 순종적이고 나약해진다. 그녀가 머뭇거리면, 예수님께서는 그분을 주님이라고 인정할 때 받는 성령의 자유라는 주제로 그녀를 부드럽게 불러 들이신다. 그분은 그녀의 환상, 의존성, 속물 근성을 버릴 수 있는 존재의 더 깊은 곳으로 부르신다. 그분은 그녀를 있는 그대로 사랑하시면서 그녀에게 계속해서 더 요구하신다.
우리는 종종 사랑에 요구적인 측면이 있다는 것을 망각한다. 사랑은 그저 인정만 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정말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들에게 그들이 할 수 있고 해야만 하는 모든 것을 하기를 원한다. 우리는 그들이 자신들의 천박함에서 나와 그들의 심연에 닿을 수 있도록 불러내는 모험을 감행한다.
우리를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들도 이와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도전하고 우리 안에 있는 가장 좋은 것을 불러낸다. 그들은 이제까지의 자신들 보다 더 나은 자신들이 되기를 원하고, 우리가 성장의 가능성을 제시하고 받아들일 것을 요구하며 우리에게 익숙하지 않은 곳으로 나아가는 우리를 지원해준다. 예수님의 사랑에도 이런 요구적인 측면이 있다.
제 6장에 이런 사랑의 적절한 예가 있다. 예수님은 절름발이 옆을 지나가면서 그를 측은하게 생각하셨지만 즉석에서 그를 고쳐 주지 않으셨다. 대신에 그에게 '낫기를 원하는가' 물으신 후 그가 '그렇다고' 대답을 한 후에야 주님께서는 그를 고치신다.
우리는 종종 건강에 해로움에도 불구하고 우리 자신이 불구상태에 안주하기를 원한다. 우리자신의 방어수단과 환상을 갖고 사는 것이 그것들을 내어 던지고 새로운 삶의 요구와 직면하는 것보다 더 쉽다. 우리는 치유되기보다는 동정 받기를 더 원한다. 주님께서는 우리를 그런 상태로 버려 두시기를 원하지 않으시나, 우리의 동의 없이는 치유하시지 않으신다.
우리는 그분의 요구하시는 사랑에 “예”라고 대답하고 우리를 온전히 맡겨 죄에서 은총으로, 죽음에서 생명으로 이끄시도록 해야한다. 그렇게 할 때 모든 것이 그분의 은총에 찬 사랑이었음을 알게 된다.
<성서의 위대한 주제들-신약>, 리차드 로어 & 죠셉 마르토스(참사람되어 2000년 7월호 번역)