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기우 신부 강론]
1. 오늘 들으신 루카 복음 제6장의 복음 말씀은 행복 선언과 불행 선언입니다. 루카는 예수님의 공생활 중에 있었던 한 사건이 아니라 공생활 내내 선포된 하느님 나라 복음을 상징적으로 대표할 수 있는 상황을 집대성하여 보도하고 있습니다. 그런 의도의 흔적을 엿볼 수 있게 해 주는 것이 도입부의 상황 묘사입니다.
예수님께서 열두 사도와 함께 산에서 내려가 평지에 서시니, 그분의 제자들이 많은 군중을 이루었다고 했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복음선포를 듣고 열두 명만이 아니라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군중을 이룰 정도로 제자단을 형성했다는 말입니다. 그분의 복음은 하느님 나라에 대한 것이었고, 하느님의 사랑에서 나오는 힘이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치유와 구마의 기적들로 나타났기 때문에 그 가르침을 듣고 그 기적을 체험하고 목격한 이들이 회개하여 하느님의 백성이 되었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그 군중의 규모와 출신 지방에 대해서 루카는 이스라엘 방방곡곡에서만이 아니라 주변 이방인 지역까지 망라하고 있다고 소개하였습니다. 온 유다와 예루살렘, 그리고 티로와 시돈의 해안 지방에서 온 백성이 큰 무리를 이루고 있었다는 묘사가 그것입니다.
2. 그 많은 사람들 앞에서 특히 제자가 된 군중을 보시며 선포하신 말씀은 하느님 나라의 행복이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 지금 굶주리는 사람들 그리고 지금 우는 사람들에게 예수님께서는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선언하셨습니다. 사회 현실로 보면 지옥과도 같은 고통 속에서 사는 이들에게 그 고통에서 벗어나서 삶의 희망과 위로를 안겨주시는 분이 아니고서는 하실 수 없는 말씀을 그분은 하셨습니다. 이는 예수님께서 실천하신 가난한 이들을 위한 우선적 선택 행동의 결과였습니다.
지금 굶주리는 사람이 배부르게 되고, 지금 우는 사람이 웃게 될 것이라는 말씀은 미래형 시제로 되어 있지만, 굶주리기도 하고 울기도 하는 가난한 사람이 하느님 나라를 차지하고 그 나라의 행복을 얻고 있다는 선언은 현재형 시제로 되어 있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현실, 즉 삶의 희망과 위로와 격려를 가져다 주신 예수님이시기 때문에 하실 수 있는 말씀이었습니다.
만일 그렇지 않다면, 다시 말해 가난해서 굶주리고 우는 사람들에게 아무런 희망도 위로도 주지 못하면서 이런 말씀을 하신다면 아무런 공감을 얻지 못했을 것입니다. 공감을 얻기는커녕 반감을 샀겠지요. 굶주림이나 슬픔을 수반하는 가난은 절대로 그 자체로는 행복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행복을 가져다주고, 굶주린 사람들에게 먹을 것을 주며 우는 사람들을 위로해 주시는 분, 그분이 바로 예수님이셨습니다.
3. 하지만 지금 굶주리고 울어야 할 만큼 슬픈, 가난한 이들에게 하느님 나라의 행복을 선언하는 일은 저절로 될 수 있는 일이 아닙니다. 예수님 스스로 그 가난한 이들과 똑같은 가난한 삶을 살아야 하고, 함께 굶주리고 같이 우는 삶으로 내려가야 가능한 일이었습니다. 이를 자발적 가난이라 합니다. 이를 열두 사도들이 파견되어 행하게 되면 사도적 가난이 됩니다. 지옥에 빠져 고통을 겪고 있는 가난한 이들에게 찾아가서 함께 그 고통과 가난을 받아들이는 것, 이것이 복음선포의 시작입니다.
자발적 가난을 선택하신 예수님이나 이를 사도적 가난으로 계승하려는 사도들이 받아들여야 하는 십자가는 고통과 가난뿐이 아니었습니다. 예수님께서도 몸소 겪으셔야 했던 일이거니와 사도들 역시 미움을 받고, 쫓겨나기도 하며, 모욕과 중상을 당할 것을 각오해야 하는 일이었습니다.
4. 누가 고통받는 가난한 이들을 돕겠다는 이들을 미워하고 쫓아내며 모욕과 중상을 가하는가? 그 사람들은 가난한 사람들이기도 하고, 그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있는 사람들이기도 합니다.
가난은 그 사회의 총체적 비리와 악이 초래하는 병리현상이기 때문에 가난한 사람들은 그 사회를 살아가는 사람들이 내뿜는 독을 집어삼키며 살아가는 피해자요 희생자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가난한 이들을 찾아가는 사람들은 설사 그 찾아가는 동기가 그들을 도우려는 선한 지향이라고 해도 그 가난한 사람들이 머금어야 했던 독을 품어내는 역할을 누군가는 해야 합니다. 대개는 도우려고 찾아간 사람들이 해야 하게 되어 있습니다. 그 양상이 대개는 의심과 텃세로 나타납니다. 하도 워낙 억눌리고 이용당하다 보니 생겨나는 어쩔 수 없는 과정입니다. 그 과정을 견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기대했던 고향 사람들로부터 배척을 받으셔야 했습니다. 가난한 이들에게 복음을 전하기 위한 첫 번째 십자가라 할 수 있습니다.
5. 하지만 두 번째 십자가가 본격적입니다.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어서 부를 축적하고 가난한 사람들을 억누르며 착취하는 자들은 대개 그 부를 이용하여 높은 사회적 지위와 권세를 차지한 자들일 경우가 많고 또 그들이 가진 지식을 방패삼아 가난한 이들의 가난이 죄를 저지른 탓이라는 허위 이데올로기를 조작하여 뒤집어씌우는 수가 많습니다. 그래서 예수님 시대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율법도 모르는 저주받을 족속으로 경멸당했으며, 자본주의 시대인 오늘날에도 가난한 사람들은 구매력이 없다는 이유로 사회 전반에 걸쳐서 구조적인 소외를 당하고 있습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많이 배울 수 없어서 무식하고, 가난하기 때문에 질 좋은 일자리를 차지할 수 없이 강도 높은 노동을 열악한 환경에서 해야 하니까 쉽게 병에 걸리거나 심지어 사고를 당해 장애자가 되기 일쑤입니다. 가난하기 때문에 억울한 일을 당해도 자신의 일을 도와줄 사람들도 많지 않아서 그냥 속수무책으로 당하는 게 예사입니다.
그래서 가난한 사람들을 도우려는 사람들은 차츰 가난한 사람들을 가난하게 만들고 있는 사회 구조에 눈을 돌리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 사회 구조의 사악함을 깨닫게 되기 마련입니다. 그리고 그 사악한 사회 구조에서 혜택을 누리는 사람들을 만나게 되지요. 예수님께서 지금 배부르고 지금 웃는 부자들에게 불행을 선언하신 맥락과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불의한 기득권을 누리는 이들에게 불행을 경고하고 회개를 요청하는 일은 가난하고 고통받는 이들에게 행복을 선언하는 일과 동전의 양면과도 같아서 택일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동시에 행해질 수밖에 없는 일입니다. 이것이 대개는 사회 여론과 정치 권력에 맞서서 긴장스런 대립과 불편한 갈등 관계에 들어서는 일이기 때문에 역사에서는 회피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박해 시대에 용감했던 천주교회가 일제 강점기에 정교분리 노선을 내세우며 친일 행각을 벌인 일도, 유신 독재 시대에 교도권이 툭하면 침묵을 일삼았던 행태가 바로 그런 경우에 해당합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자선을 베풀면서도 불의한 기득권을 누리는 자들에게 침묵하거나 심지어 그자들로부터 검은 돈을 받는 데 만족하고 있으면, 교회의 복음선포는 반쪽이 되어 버리고 복음선포의 진정성은 반토막이 납니다. 무엇보다도 복음을 선포해야 할 교회의 품격은 땅에 떨어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제자라는 평판 대신에 예수님의 이름을 팔아서 먹고 사는 집단이라는 평판을 얻을 수밖에 없게 됩니다. 슬프게도 이러한 사례는 역사상 숱하게 일어났고, 이 땅에서도 마찬가지였습니다.
하지만 지옥의 불행에 대해서는 천국의 행복을 선언해야 하고, 그 불행을 자초하는 자들에게는 경고하지 않을 수 없는 법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는 그래서 생겨났습니다. 그 십자가에 대해서 예수님께서는 또 다른 행복으로 선언하셨습니다. “사람들이 너희를 미워하면, 그리고 사람의 아들 때문에 너희를 쫓아내고 모욕하고 중상하면, 너희는 행복하다! 그날에 기뻐하고 뛰놀아라. 보라, 너희가 하늘에서 받을 상이 크다.”
6. 십자가 없는 부활은 없습니다. 예수님처럼 복음을 선포하면, 행복과 불행을 올곧게 선언하면, 현실에서 십자가는 불가피하지만 다시 그 현실에서 부활하게 되어 있습니다. 현실의 교도권과 많은 가톨릭 그리스도인들이 십자가에 관한 복음은 건성으로 듣고 막연하게 전례상으로만 부활을 바라는 경향이 있어 보입니다만, 십자가와 부활은 신앙의 공리입니다.
사도 바오로의 확신대로, 우리가 현세만을 위하여 그리스도께 희망을 걸고 있다면, 우리는 모든 인간 가운데에서 가장 불쌍한 사람일 것입니다. 십자가가 무섭고 힘들어보여서 죽은 후의 부활만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교회의 복음선포는 절름발이가 됩니다. 예수님께만 해당되고 정작 지금의 우리 자신들에게는 해당되지 않는다고 스스로 포기하는 꼴이 되기 때문입니다.
7. 하지만 부활하신 예수님을 믿는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도 짊어져야 하지만 그분이 허락하시는 부활도 누려야 합니다. 죽은 후에 내세에서만이 아니라 복음선포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그 현실에서 가난한 이들 안에서 부활할 수 있어야 합니다. 부활에 대한 믿음과 희망, 이 진리에 대해서 오늘 독서에서 들은 예레미야 예언자의 예언이 심상치 않습니다. “사람에게 의지하는 자와 스러질 몸을 제힘인 양 여기는 자는 저주를 받으리라. 그는 사막의 덤불과 같아 좋은 일이 찾아드는 것도 보지 못하리라.”
이기우 신부
서울대교구, 영원한도움의성모회 파견사제